[기획] 헤르쿨라네움 탄화 파피루스, 연구진이 직접 만들고 태운 '모형 스크롤'로 납 성분 잉크의 X선 판독법 확인

손창한 기자 · 입력 2026.09.23 06:58
미국·영국 공동연구팀, 진짜 유물 대신 복제품을 태워 실험… 납 섞인 잉크는 X선에 뚜렷이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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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Sara Stabile·Francesca Palermo·Inna Bukreeva 외, CC BY 4.0)

고문서 복원가가 진품을 실험대에 올리기 전에, 똑같이 생긴 가짜를 먼저 만들어 태워보는 경우가 있다. 미국과 영국의 국제 연구팀이 꼭 이런 방식으로 실험을 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불에 탄 채 굳어버린 이탈리아 헤르쿨라네움의 2,000년 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대신, 연구팀이 직접 파피루스에 글씨를 쓰고 구워 만든 '모형 두루마리'로 실험한 것이다. 그 결과 잉크에 납 성분이 섞여 있으면 X선으로 글자를 뚜렷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연구는 국제학술지 PLOS ONE(21권 9호)에 2026년 9월 16일 게재됐다.

왜 2,000년째 못 읽었나

헤르쿨라네움은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화산재에 묻힌 '파피루스 저택'에서 두루마리 수백 점이 통째로 탄화된 채 발견된, 현존하는 유일한 고전 고대 도서관으로 불리는 곳이다. 두루마리는 1750년대 처음 발굴됐는데, 당시 학자들이 무리하게 펼치려다 상당수를 훼손했고 1999년 이후로는 물리적으로 펼치는 시도 자체가 중단됐다. 문제는 펼치지 않고 X선으로 속을 들여다봐도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잉크와 그것이 쓰인 파피루스가 둘 다 불에 탄 유기물이다 보니, X선을 얼마나 흡수하는지에 차이가 거의 없어 컴퓨터로도 글자와 배경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2015년 유럽싱크로트론방사광연구소(ESRF)가 X선 위상대비영상이라는 정밀 기법으로 처음 그리스 문자를 읽어내며 가능성을 보였고, 2023년에는 미국 켄터키대 교수가 주도한 '베수비우스 챌린지'에서 대학원생 3명이 인공지능(AI)으로 두루마리 섬유의 미세한 질감 차이를 잡아내 두루마리 한 편을 처음 통째로 해독하는 데 성공하며 70만 달러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이번 연구는 질감이 아니라 잉크 속에 섞인 금속 성분 자체가 내는 X선 신호를 겨냥했다는 점에서 접근이 다르다.

직접 만들고 태운 '가짜 두루마리'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UC버클리)와 제휴한 은퇴 발명가 더글러스 세일러가 주도하고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파피루스학과, 영국 STFC 러더퍼드 애플턴 연구소 소속 연구자 등 6명이 참여한 이번 연구는 현대 이집트산 파피루스에 갈대펜과 일본산 그을음 계열 잉크로 글을 쓰는 것에서 시작했다. 필사는 고등학생들이 맡았고, 쓰인 문장에는 성경 구절이 포함됐다. 연구팀은 이 잉크에 질산납을 0, 20, 25, 50, 100, 200 마이크로그램(㎍)/㎠까지 여섯 단계 농도로 섞은 뒤, 강철 용기에 말아 넣고 산소가 적은 상태에서 약 400~900℃로 구워 탄화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만든 모형 두루마리를 NIST의 X선 CT 장비로 스캔하고, 원래 리튬이온 배터리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해 개발된 소프트웨어를 개조한 '가상 펼침' 기법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납이 전혀 없는 대조군에서는 글자가 검출되지 않았지만, 25㎍/㎠ 이상 농도부터는 테스트한 모든 구간에서 글자가 뚜렷이 드러났다. 연구팀은 납이 주변의 탄화 파피루스보다 X선을 최대 약 25배 더 많이 흡수한다고 보고했다. 공항 검색대에서 금속 물체만 유독 밝게 잡히거나, 어두운 방에서 검은 옷보다 은박지가 손전등 빛을 훨씬 강하게 반사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헤르쿨라네움 두루마리에서 납 성분 잉크가 확인된 것 자체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 에마뉘엘 브룅(Emmanuel Brun) 등 연구진이 PNAS에 발표한 연구에서 두루마리 조각 2점에서 이미 납이 검출돼, 금속 잉크가 4세기부터 쓰였다는 기존 통념을 1세기로 약 300년 앞당긴 바 있다. 당시 실측된 납 밀도는 시료에 따라 16~84㎍/㎠였다. 이번 연구는 그 후속으로 '납이 있으면 기계로 더 쉽게 읽히는가'를 모형 실험으로 검증한 셈이다.

비싼 정밀촬영 전에 휴대용 스캐너로 먼저 훑는다

연구팀은 소성이 끝난 모형 두루마리 표면을 휴대용 X선 형광분석(XRF) 장비로도 스캔해 납을 검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병원에서 모든 환자에게 처음부터 값비싼 MRI를 찍지 않고 간단한 문진으로 먼저 걸러내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다. 두루마리 하나하나를 방사광가속기 같은 값비싼 정밀 장비로 가상 개봉하기 전에, 저렴하고 간단한 휴대용 XRF로 '이 두루마리에 납이 있는가'만 먼저 훑어 우선순위를 정하자는 것이다. 납이 있는 두루마리부터 정밀 촬영하면 한정된 예산과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제안이다.

남은 의문들

다만 이 방법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납이 섞이지 않은 잉크에는 이 선별법이 통하지 않는다. 2차원 방사선 촬영만으로는 납이 없는 탄소 기반 잉크와 탄화 파피루스를 구분할 대비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연구팀에 자문으로 참여한 UC버클리 대학원생은 모든 두루마리에 납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며 "일부는 있고 일부는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금까지 진짜 헤르쿨라네움 파편 중 납 잉크가 확인된 사례는 단 2건뿐이며, 도서관 전체 두루마리를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납 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실험 자체도 현대 이집트산 파피루스와 인위적으로 납을 넣은 잉크로 만든 모형에 그쳤고, 실제 2,000년 된 원본 유물과 방사광가속기를 직접 결합한 검증은 접근 제약으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논문은 밝혔다. 2009년 두루마리에서 처음 금속 잉크를 발견했고 이번 연구에는 참여하지 않은 베수비우스 챌린지 공동 창립자는, 연구팀의 시도를 평가하면서도 두루마리마다 납 농도가 들쭉날쭉하고 전반적으로 낮다는 점은 납이 당시 잉크의 표준 성분이 아니라 우연히 섞여 들어간 혼입물일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신중론을 폈다. 다만 이 발언은 원출처 보도가 접속 제한(451 오류)으로 직접 확인되지 않았고, 2차 검색 스니펫을 통해서만 확인된 내용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납이 섞인 두루마리가 상대적으로 더 쉽게 읽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납이 없는 두루마리를 읽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와 별도로, 이번 연구에 자문으로 참여한 UC버클리 대학원생은 실물 유물에 이 방법을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모형을 손상시키는 것은 괜찮지만 실제 유물을 손상시키면 고고학계의 반발이 클 것이라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스스로도 더 엄밀한 잉크 농도 연구와 더 견고한 판독 알고리즘, 휴대용 XRF를 다수의 두루마리에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방법론이 앞으로 필요하다고 밝혔다. 논문이 발표된 지 아직 1주일 남짓밖에 되지 않아 학계의 폭넓은 반응은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납이 있는 두루마리를 먼저 찾아내는 저비용 선별법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두루마리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실물 검증을 거쳐야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자료: PLOS ONE,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UC버클리),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영국 STFC 러더퍼드 애플턴 연구소, 유럽싱크로트론방사광연구소(ESRF),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켄터키대학교(베수비우스 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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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한 기자 ch.son@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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