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논문 생산 세계 2위인데 기술 주도권은 놓쳤다—EU ‘SRIP 2026’이 진단한 시장 전환 병목

좋은 선수가 많아도 패스가 계속 끊기면 득점하기 어렵다. 유럽연합(EU)의 연구혁신 체계가 그렇다. EU는 과학 논문 생산량 세계 2위이고, 과학 출판물 100편 가운데 57편에는 국제협력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세계 PCT 국제특허출원, 즉 여러 나라에서 특허권을 확보하기 위한 국제출원 절차에서 EU가 차지한 비중은 2000년 약 30%에서 2022년 약 16%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중국의 비중은 약 3%에서 거의 33%로 높아졌다.
논문과 특허가 엇갈린 방향을 가리키지만, 이를 곧바로 ‘논문이 특허로 바뀌지 못한 비율’로 읽어서는 안 된다. 논문 생산량과 세계 PCT 출원 점유율은 같은 연구성과를 추적한 지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PCT 출원 역시 제품 출시나 매출, 제조시설, 시장점유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강한 과학 기반이 기술 주도권과 기업 성장으로 자동 연결되지 않는다는 구조적 경고로는 읽을 수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연구혁신총국이 2026년 10월 1일 발표한 격년 정책보고서 《Science, Research and Innovation Performance of the EU 2026》(SRIP 2026)의 핵심 진단이다.
2002년에 세운 3% 목표, 현재 추세라면 2057년
첫 병목은 투자다. EU의 연구개발 지출은 2000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1.81%에서 2024년 2.24%로 상승했지만, 목표인 3%에는 미치지 못했다. EU는 2002년 이미 2010년까지 이 비율을 3%에 접근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 목표 도달 시점은 약 2057년으로 추산된다.
2030년까지 3% 목표에 도달하려면 2025년부터 2030년까지 누적 약 5650억유로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보고서의 계산이다. 공식 발표문은 이를 반올림해 약 5600억유로로 표시했다. 현재 GDP를 기준으로 2.24%와 3%의 차이를 단순 환산하면 연간 약 1270억유로다. 누적 5650억유로는 확정된 예산도, 한 해의 부족액도 아니다. GDP와 연구개발 지출 추세에 따른 전망치여서 성장률과 민간투자의 반응, 기준 GDP가 달라지면 함께 변한다.
문제는 돈의 총량만 늘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연구성과가 제품 후보가 되는 초기 기술개발 단계, 기업이 생산과 시장 진출 규모를 키우는 후기 단계에서 서로 다른 자금 공백이 나타난다. EU의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 시장은 성장했지만 미국보다 스케일업 기업 수가 적고 후기단계 자금 격차가 크다. EU 기업이 외국 성장자본에 의존하는 점도 전략적 취약성으로 지목됐다.
연구실에서 시장까지 이어지는 ‘두 개의 계곡’
기술마다 넘어야 할 계곡도 다르다. 생명과학은 임상개발과 후기단계 자금, 규제 경로, 시장 접근이 관문이다. 청정기술은 제조 규모와 기반시설, 에너지 비용, 순환성, 초기 수요와 금융조달 가능성이 얽혀 있다. 디지털 분야에는 연산 자원과 연결성, 전문인력, 기술 확산, 해외 인프라·서비스 의존 문제가 놓여 있다. 연구성과를 제품 후보로 만드는 첫 번째 계곡을 건넌 뒤에도, 이를 공장과 세계시장 규모로 키우는 두 번째 계곡이 기다리는 셈이다.
국경을 넘는 논문에 비해 기업 성장의 연결망은 국경에서 자주 끊긴다. EU의 산학협력은 국내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돼 국경을 넘는 연결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공동특허 네트워크는 미국보다 분절돼 있으며 첨단기술에서 그 격차가 더 크다는 것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연구지원과 규제, 세제, 조달, 자본시장이 회원국별로 갈린 구조가 연구성과의 배치와 기업의 규모 확대를 어렵게 한다.
산업구조의 차이도 중요하다. 보고서는 EU와 미국 기업의 연구개발 격차가 같은 업종 기업들의 투자성향 차이보다 산업구성의 차이에서 주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EU에는 자동차 등 중간기술 제조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미국에는 소프트웨어·정보통신기술, 바이오, 지식집약 서비스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첨단반도체·클라우드·인공지능은 EU의 기술적 위치와 공급망 자립도가 모두 취약한 분야로 분류됐다. 반면 첨단소재와 첨단제조, 일부 녹색기술에서는 상대적 강점이 확인됐다. 모든 분야를 하나의 ‘유럽 경쟁력’으로 묶어서는 처방도 흐려질 수 있다는 의미다.
생산성 격차까지 사업화 실패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전환의 지연은 경제 지표와도 함께 나타난다. 지난 25년간 EU 노동생산성의 증가 폭은 미국의 약 절반이었다. 이는 생산성 수준 자체가 미국의 절반이라는 뜻은 아니다. 시간당 노동생산성 수준은 미국 대비 1990년대 중반 약 68%에서 2025년 약 57%로 낮아졌다. 2025년 실질경제 규모도 2019년보다 EU는 7%, 미국은 15%, 중국은 약 3분의 1 커졌다.
그러나 생산성 부진을 연구 사업화 실패 하나로 돌릴 수는 없다. 정보통신기술 산업의 비중, 설비투자, 고용과 노동시간, 인구구조, 기업 진입과 노동 이동도 함께 작용한다. 1995년부터 제기된 ‘유럽 역설’, 즉 우수한 과학성과에 비해 기술·상업 성과가 약하다는 해석에도 학술적 비판이 있다. 2006년과 2018년 연구들은 유럽이 상업화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위 과학성과와 신산업 기반 양쪽 모두에서 약점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SRIP 2026 자체도 단일 동료심사 논문이 아니라 여러 통계와 계량분석을 종합한 정책보고서다. Scopus 출판물, PATSTAT PCT 특허, 기업·거시·연구자·지역혁신 자료를 함께 사용했지만 공개 동료심사 파일과 전체 재현 코드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행기관이 연구예산 확대와 역내 투자·규제 정책을 추진하는 EU 집행위원회라는 점도 해석할 때 고려해야 한다.
한국도 높은 투자비율 다음 단계를 물어야 한다
한국의 2024년 총 연구개발비는 131조462억원, GDP 대비 5.13%였다. GDP 100원 가운데 약 5원13전을 연구개발에 쓴 셈으로 EU의 2.24%보다 높은 집약도다. 수행 주체별로는 기업이 106조6988억원으로 81.4%를 차지했고, 공공연구기관은 13조2936억원·10.1%, 대학은 11조538억원·8.4%였다. 따라서 EU의 진단을 한국에 그대로 옮겨 ‘대학 논문을 기업이 가져가지 못하는 문제’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한국 공공연구기관의 기술이전율은 2021년 40.9%에서 2022년 31.7%, 2023년 30.2%로 낮아졌다. 2023년 수치는 신규 확보 기술 3만9930건과 이전 기술 1만2076건을 단순 비교한 것이다. 과거 개발된 기술이 당해 연도에 이전될 수도 있어 제품 출시율이나 사업 성공률, 매출 발생률로 해석하면 안 된다. 기술이전 계약 1건당 수입도 2019년 2690만원에서 2023년 2540만원으로 감소했다. 높은 연구개발비 비율과 기술이전 건수 다음에 공공기술 고도화, 초기 고객, 후속투자, 이전 후 매출을 따로 살펴야 하는 이유다.
한국과 EU를 같은 분모와 추적방식으로 비교한 논문→특허→창업→투자→매출의 장기 전환율은 확인되지 않았다. 공통된 교훈은 논문을 억지로 특허로 바꾸는 단일 정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연구비와 민간투자, 자본시장, 규제, 조달, 생산시설, 시장을 하나의 경로로 연결해야 한다. 과학의 성과가 경제와 사회에 도착하려면 좋은 연구만큼이나 끊기지 않는 전달체계가 필요하다.
자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연구혁신총국, 유럽혁신위원회, 경제협력개발기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산업통상자원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