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손가락으로 걷다...스위스 연구진, 다리 없는 '보행 로봇손' 개발

손가락으로 물건을 쥐던 로봇 손이 이번엔 다리 노릇까지 해냈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ETH 취리히) 산하 소프트 로보틱스 연구실(SRL)이 로봇 손의 손가락을 다리처럼 움직여 스스로 걷고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로봇 손은 보통 팔 끝에 달려 물건을 쥐고 조작하는 용도로만 쓰인다. 이번 연구는 그런 손을 팔에서 떼어내 바닥 위에 놓고, 손가락 다섯 개만으로 몸 전체를 지탱하며 이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존 로봇 손 활용법과 크게 다르다.
연구팀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로봇 손 '우지(WUJI)'를 사용했다. 이 로봇 손은 손가락 다섯 개에 각각 관절이 네 개씩 달려 있어 전체 스무 개 관절을 움직일 수 있다. 연구팀은 여기에 소형 컴퓨터인 라즈베리파이 제로 2W와 자세를 감지하는 관성측정장치(IMU·물체의 기울기와 움직임을 재는 센서), 리튬폴리머 배터리를 달았다. 신호에 섞인 잡음을 걸러내기 위해 저역통과필터(특정 주파수 이상의 흔들림을 걸러 신호를 매끄럽게 만드는 처리 방식)도 적용했다. 바퀴나 다리 같은 별도 이동장치 없이, 원래 물건을 쥐는 용도로 설계된 손가락만으로 몸을 지탱하고 이동하도록 만든 것이다. 장치를 더해도 무게는 손 자체 738g에 80g을 보탠 818g에 그쳤고, 별도 연결선 없이 스스로 움직였다. 무게를 가볍게 유지한 것은 손가락 관절에 걸리는 부담을 줄이면서도 배터리와 컴퓨팅 장치를 자체 탑재해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이동의 핵심은 강화학습(로봇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스스로 최적의 동작을 찾아가는 인공지능 학습 방식)이다. 연구팀은 기어가기와 방향 전환, 넘어졌을 때 일어나기, 키보드 자판 누르기, 물체 밀기 등 네 가지 동작마다 별도의 강화학습 정책을 시뮬레이션 환경에서 학습시킨 뒤 실제 로봇에 적용했다. 하나의 정책이 모든 동작을 다 처리하게 하는 대신 동작별로 정책을 나눈 것은, 걷기와 균형 잡기, 물체를 미는 힘 조절처럼 서로 성격이 다른 과제를 각각 더 안정적으로 학습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공개된 영상을 보면 로봇 손은 실내외 다양한 바닥을 이동하고, 넘어지면 스스로 자세를 되찾으며, 키보드의 특정 키를 누르거나 주변 물체를 밀어내는 등 환경과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측 평균 이동속도는 초당 0.093m로 사람의 걸음보다 훨씬 느리지만, 애초에 걷기용으로 설계되지 않은 손이 스스로 몸을 지탱하며 이동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기술은 로봇에 탑재된 컴퓨팅 장치가 동작을 직접 판단하고 제어하는 '온보드' 방식으로 구현됐다. 외부 컴퓨터나 서버에 실시간으로 연결하지 않고도 로봇 스스로 다음 행동을 계산해 실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은 통신이 끊기거나 지연되는 환경에서도 로봇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향후 협소한 공간이나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서의 활용 가능성과도 맞닿아 있다. 이동, 방향 전환, 낙상 후 일어나기, 키보드 누르기, 물체 밀기 등 각각의 동작은 서로 다른 강화학습 정책으로 나뉘어 제어됐다.
연구를 이끈 로버트 카츠슈만 교수의 연구실은 앞서 제작비 2000스위스프랑 미만으로 설계도와 제어 소프트웨어를 모두 공개한 오픈소스 로봇 손 '오르카 핸드(ORCA Hand)'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연구에는 오르카 핸드가 아니라 시중 상용 손인 우지가 쓰였는데, 원래 물건을 쥐고 다루는 데 특화된 기성 로봇 손을 이동 수단으로도 함께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이 이번 실험의 특징이다. 특수 제작된 로봇이 아니라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손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점은, 별도의 다리나 바퀴를 새로 설계하지 않고도 기존 로봇 손의 활용 범위를 넓힐 수 있음을 시사한다. 관련 동영상은 유튜브에 공개됐으며, 연구 논문은 출판 전 논문 공개 사이트 '아카이브(arXiv)'에 게재됐다.
자료: ETH 취리히 소프트 로보틱스 연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