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기술이 안보가 됐다…반도체·소재·국방의 '국산화 러시', 구호를 넘어서려면

임형광 기자 · 입력 2026.07.23 15:18 · 수정 2026.09.07 10:54
일본이 쥐고 있던 부품, 98.9% 외산이던 국방칩, 원자로로 가는 배까지…경제안보 의제가 된 국산화의 진짜 관건은 양산·수요처·지속 투자다
[기획] 기술이 안보가 됐다…반도체·소재·국방의 '국산화 러시', 구호를 넘어서려면
반도체·소재 국산화 논의의 핵심인 12인치 실리콘 웨이퍼 (사진 출처=Wikimedia Commons, Peellden, CC BY-SA 3.0)

허공에 뜬 화면을 손끝으로 누르는 기술이 있다. 이 '유사 홀로그램'의 심장은 미러반사판이라는 얇은 시트인데, 그동안 정밀 미세가공 기술을 앞세운 일본 기업이 전 세계에 홀로 공급해 왔다. 그 부품을 최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국내 기술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작은 소식 같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훨씬 큰 흐름의 한 장면이다. 반도체 소재부터 국방 부품, 심지어 배를 움직이는 원자로까지 '남의 손'에 있던 핵심 기술을 국내로 끌어오려는 움직임이 동시다발로 번지고 있다.

더 눈여겨볼 것은 이 국산화가 이제 산업 정책의 언어가 아니라 안보의 언어로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부품 하나를 못 구해 생산 라인이 멈추고, 무기의 핵심 칩을 외국이 끊으면 국방이 흔들린다. 기술이 곧 안보가 된 시대, 국산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됐다.

일본발 충격 6년, 국산화는 어디까지 왔나

출발점은 2019년이었다.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을 조이자, 한국은 부품 하나에 산업 전체가 인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했다. 그 뒤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이른바 '소부장' 특별법을 뜯어고치고 외국 의존 품목의 국산화에 매달려 왔다.

성과는 분명히 있다. 산업 현장에서는 반도체 소재의 대일(對日) 의존도가 한때 30%대에서 지금은 10%대 후반까지 내려온 것으로 본다. 논란이 컸던 고순도 불화수소는 일본산 수입을 크게 줄여도 수급에 문제가 없을 수준까지 대체가 진행됐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이다. 극자외선(EUV·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차세대 노광 공정)용 포토레지스트(감광액)와 블랭크마스크 같은 초미세 공정의 핵심 소재는 여전히 일본의 JSR·도쿄오카공업(TOK) 등 강자들이 쥐고 있다. 무엇보다 소재·부품 분야의 대일 무역적자는 줄기는커녕 2019년 141억 달러대에서 지난해 153억 달러대로 오히려 커졌다. 국산화 품목은 늘었지만, 그만큼 첨단 소재를 더 많이, 더 비싸게 사 오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뜨거운 전선, 국방 반도체

국산화의 최전선은 이제 국방으로 옮겨붙었다. 23일 정부는 제11회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국방 반도체 국산화 및 산업생태계 조성전략'을 심의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산업통상자원부·방위사업청이 함께 만든 이 전략의 배경에는 뼈아픈 숫자가 있다. 무기체계에 들어가는 국방 반도체의 98.9%를 해외에서 설계하거나 생산한다는 것이다.

미사일과 레이다, 위성이 모두 반도체로 움직이는데 그 칩을 사실상 전량 밖에서 들여온다면, 유사시 공급이 끊기는 순간 무기가 멈춘다. 정부가 향후 5년간 국방 반도체에만 3300억 원을 투입하기로 한 이유다. 개별 부품 몇 개를 국산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설계부터 양산까지 '전(全)주기 생태계'를 세우겠다는 것이 골자다.

이용철 방위사업청장은 "단순히 개별 부품 국산화를 넘어 설계부터 생산까지 지속 가능한 전주기 국방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기업도 이미 움직이고 있다. 한화시스템은 서울대·성균관대와 손잡고 레이다, 탐색기, 영상레이다(SAR) 위성, 위성·전술 통신, 고출력 마이크로파(HPM)에 쓰이는 반도체 칩의 국산 개발에 착수했다.

원자로로 가는 배, 국산화의 지평이 넓어진다

국산화의 무대는 소재와 부품을 넘어 거대 플랫폼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로 움직이는 1만5000TEU급 컨테이너선의 개념설계로 미국선급협회(ABS)의 기본승인(AiP)을 받았다. 용융염원자로 두 기를 동력원으로 삼는 이 배는 KRISO와 한국원자력연구원, 삼성중공업이 함께 그렸다.

탄소를 내뿜지 않는 차세대 선박 시장은 아직 국제적으로 기술 개발이 한창인 미지의 영역이다. 이 초입에서 국제 선급으로부터 설계의 기술적 타당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남이 깔아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 길의 지도를 우리가 먼저 그린다는 의미에 가깝다. 기술주권이 '따라잡기'에서 '앞서가기'로 성격을 바꾸는 대목이다.

구호를 넘어 경쟁력이 되려면

흐름은 분명하다. 정부의 소부장 기본계획과 특화단지 종합계획(2026~2030)은 핵심기술 40개 확보와 30조 원 규모의 기업 투자, 8000명 이상의 고용을 내걸었다. 특화단지는 2030년까지 10곳에서 20곳으로 늘리고, 내년 소부장 특별회계 예산은 올해보다 1467억 원 늘린 2조4310억 원으로 편성됐다.

그러나 '국산화에 성공했다'와 '국산화로 먹고산다'는 전혀 다른 문제다. 실험실에서 부품을 만들어낸 것과, 그것이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경쟁력이 되는 것 사이에는 넓은 강이 놓여 있다. 그 강을 건너는 다리는 세 가지다.

첫째는 양산이다. 시제품 하나를 만드는 것과 불량 없이 수백만 개를 찍어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기술이다. 일본이 수십 년간 소재 시장을 지켜 온 힘도 결국 이 '균일하게 대량으로 만드는' 노하우에 있었다. 둘째는 수요처다. 아무리 좋은 국산 소재라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대형 수요 기업이 자기 공정에 실제로 채택해 주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검증에만 수년이 걸리는 반도체 소재의 특성상, 정부가 초기 수요를 연결해 주는 '마중물' 역할이 결정적이다. 셋째는 지속 투자다. 국산화 성공은 뉴스가 되지만, 그 뒤 5년·10년의 꾸준한 후속 투자가 끊기면 애써 확보한 기술은 이내 뒤처진다. 2019년의 위기의식이 옅어질 때가 진짜 시험대다.

기술이 안보가 된 시대에 국산화는 옳은 방향이다. 다만 방향이 옳다고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국산화가 자립을 알리는 구호에 머물지,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경쟁력으로 자랄지는 양산 라인과 수요 기업, 그리고 위기가 지나간 뒤에도 이어지는 투자에서 갈릴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최초 국산화' 소식이 아니라, 그 성공들이 산업으로 뿌리내렸는지를 몇 년 뒤 되짚어 보는 끈질김이다.


경쟁국은 '국가 단위'로 뛴다 — 미·일·EU·중의 실탄

국산화 경쟁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과학법(CHIPS Act)으로 보조금과 연구개발에 527억 달러를 배정했고, 유럽연합은 2023년 발효된 EU 반도체법으로 2030년까지 민관 430억 유로를 동원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의 속도가 특히 가파르다. 일본 정부는 2나노 반도체 양산에 도전하는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라피더스 한 곳에 이미 1조7000억 엔(약 16조 원)을 투입했고, 경제산업성은 2027 회계연도까지 1조1800억 엔을 더 지원하는 계획을 내놨다. 중국은 2024년 5월 재정부가 최대 주주로 나선 반도체 '빅펀드 3기'를 역대 최대인 3440억 위안(약 64조 원) 규모로 출범시켰다. 공통점은 품목 몇 개의 국산화가 아니라 국가 단위의 장기 자금이라는 점이다.

보고서와 법안이 짚은 다음 고비, 사람과 수요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2024년 보고서에서 중국 빅펀드 3기가 경기 흐름과 무관하게 긴 호흡으로 투자하는 '인내자본' 성격을 강화했으며, 민간 자금까지 합쳐 모두 1조5000억 위안 규모를 반도체 산업에 끌어올 것으로 전망된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기술 우위를 쥔 한국·대만 기업을 겨냥한 인수합병과 인력 영입으로 기술이 우회 유출될 가능성, 중국의 생산능력 확대로 범용(레거시) 반도체 가격 경쟁이 심해질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회도 움직였다. 2026년 3월 이언주 의원 등 13인은 국방반도체 산업 육성과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국방반도체추진위원회와 기본계획을 두고, 국내에서 개발한 반도체를 무기체계에 우선 적용·구매하며, 사업자 지정과 기반시설·상생협력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국산 칩의 '첫 손님'을 군이 보증해 수요처 공백을 메우겠다는 것으로, 정부 전략을 법으로 떠받치려는 시도다.

자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방위사업청,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 한국원자력연구원, 한화시스템 등·미국 반도체과학법(CHIPS Act)·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일본 경제산업성·중국 재정부·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대한민국 국회

저작권자 © 한국R&D신문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임형광 기자 hg.lim@k-rnd.net
반도체·일반공학 — 공정·소자·파운드리·메모리 및 기계·전기·토목
댓글 0 최신순 추천순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0 / 400 · 회원 로그인 시 닉네임으로 작성 · 비회원 수정은 작성 후 1분 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