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전기장이 만든 10㎛ 바람개비, 0.7% 첨가제가 빛의 회전 방향을 골랐다
폭 10㎛, 즉 0.01㎜인 통로 안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바람개비들이 줄지어 선다고 생각해보자. 1㎜ 폭에 이론상 100개가 들어갈 만큼 작은 공간이다. 이곳에 비카이랄 네마틱 액정 혼합물을 채우고 교류 전기장을 걸자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꼬인 배열이 함께 나타났다. 연구진은 혼합물 1g당 약 7㎎에 해당하는 카이랄 첨가제 0.7중량%를 넣어 둘 중 한 방향을 고른 뒤, 그 모양을 고분자 나노섬유 골격에 옮겼다.
KAIST·충남대학교·아주대학교·연세대학교·GIST InnoCORE·일본 RIKEN 공동연구진이 제시한 이번 방법의 핵심은 전기장이 빛을 내거나 액정 분자를 한쪽 손잡이 분자로 바꾼 데 있지 않다. 전기장과 미세공간이 좌우 두 종류의 바람개비를 만들고, R 또는 S 첨가제가 그중 어느 방향이 유리한지를 정하며, 고분자가 선택된 배열을 보존했다. 연구 결과는 8월 5일 온라인 공개됐으며, 현재 최종 교정 전 조기공개본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에너지가 같다는 난제
카이랄성은 어떤 구조가 거울에 비친 모습과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 성질이다. 왼손과 오른손이 닮았지만 포개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번 연구의 출발물질 MLC-6608은 비카이랄 네마틱 액정의 상용 혼합물이다. 네마틱 액정은 분자들이 대체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위치는 규칙적인 격자를 이루지 않는 상태다. 혼합물의 상세 조성은 공개되지 않아, 화학구조가 모두 알려진 대칭 분자 하나를 사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비카이랄 환경에서는 왼쪽으로 비트는 배열과 오른쪽으로 비트는 배열의 에너지가 같다. 따라서 한쪽만 자연스럽게 선택되지 않는다. 연구진이 수직배향 폴리이미드 미세채널에 액정을 넣고 채널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10㎑ 교류 전기장을 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3V/㎛에서는 분자 기울기만 변했지만, 4.5V/㎛ 조건에서는 스플레이·벤드·트위스트가 결합된 3차원 나선형 결함이 생겼다. 이는 분자들이 벌어지고, 굽고, 비트는 변형이 한 구조 안에 함께 들어갔다는 뜻이다.
첨가제가 없으면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 바람개비가 모두 생겨 전체적으로 서로 상쇄되는 라세미 배열이 됐다. 라세미란 왼쪽과 오른쪽 형태가 함께 있어 평균적인 광학활성이 사라지는 상태다. 반면 R-811 0.7중량%를 넣으면 시계방향 배열이, 그 거울상인 S-811 0.7중량%를 넣으면 반시계방향 배열이 형성됐다. 전기장이 바람개비를 만드는 동력이라면 첨가제는 좌우 후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액정으로 모양을 만들고 고분자로 틀을 떴다
첨가제 농도에는 경계가 있었다. R/S-811을 0.1중량%나 0.4중량% 넣었을 때는 반대 방향 배열이 일부 남았지만, 0.7중량%와 1.0중량%에서는 한 방향으로 통일됐다. 2.0중량%에서는 바람개비 대신 지문형 콜레스테릭 무늬가 나타났다. 다른 첨가제 R/S-5011은 0.08중량%, 혼합물 1g당 약 0.8㎎으로도 방향을 통일했다. 하지만 CB15의 성공 조건은 1.1중량%였으므로 모든 첨가제가 1% 미만이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선택된 배열을 실제 물질로 남기는 일은 별도의 문제다. 전기장을 끄거나 액정을 제거하면 정렬이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전기장을 유지한 상태에서 비카이랄 전구체 PCP-OH를 화학기상중합했다. 기체 상태의 원료를 표면에서 반응시켜 PPX-OH 고분자 나노섬유를 자라게 하는 공정이다. 액정이 만든 젤리 모양에 석고틀을 뜨듯, 나노섬유가 나선형 배열을 따라 골격을 형성했다.
이후 에탄올로 10분, n-헥산으로 6시간 세척해 액정과 방향 선택용 첨가제를 제거하고 1시간 공기 건조했다. 연구진은 FT-IR과 XPS 분석에서 세척 뒤 액정 성분의 신호가 사라진 것을 제거 근거로 제시했다. 최종 골격의 카이랄성은 PPX-OH 공유결합 사슬 자체가 비대칭 분자로 변한 결과가 아니다. 비카이랄 나노섬유들이 마이크로미터 규모의 나선 형태로 모인 중간규모·형태 수준의 카이랄성이다.
빛 전체가 아니라 좌우 성분의 작은 차이를 뒤집었다
연구진은 이 골격에 녹색 비카이랄 TADF 발광체 DtCzB-DPTRZ를 코팅한 뒤 365㎚ 자외선으로 여기했다. TADF는 열활성화 지연형광으로, 한 번 빛을 흡수한 뒤 내부 에너지 상태를 거쳐 형광을 내는 방식이다. 여기서 측정한 것은 전기로 빛을 내는 LED나 OLED가 아니라 외부 자외선을 받아 빛을 내는 광발광이다.
시계방향 골격에서는 양의 원편광 발광, 반시계방향 골격에서는 음의 원편광 발광이 측정됐다. 논문의 표기 기준으로 각각 우원편광과 좌원편광이다. 원편광은 광선 자체가 나선 궤적으로 날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빛이 진행할 때 전기장 벡터의 방향이 시간에 따라 한쪽으로 회전한다는 의미다.
550㎚ 원데이터에서 발광 비대칭 지수 glum은 R-811 골격이 +0.00854, S-811 골격이 −0.01245였다. 이를 좌우 성분의 차이로 환산하면 전체 방출의 약 +0.427%와 −0.623%다. 빛이 거의 모두 한 방향으로 회전한 것은 아니다. 핵심은 작은 차이라도 거울상 첨가제를 바꿔 별도로 제작한 골격에서 부호가 반대로 나타났다는 데 있다.
고체 시료의 원편광 측정에는 선형 이색성, 복굴절, 산란이나 시료 방향이 섞일 수 있다. 공개 심사 과정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됐다. 연구진은 시료 회전, 앞뒷면 측정, 라세미 대조군 실험을 추가했다. 550㎚에서 시료를 45도씩 돌렸을 때 R 시료는 +0.00691~+0.00937, S 시료는 −0.01489~−0.01078 범위로 부호를 유지했다. 다만 신호 크기는 각도와 고분자 투입량에 따라 달라졌다.
발광분자와 카이랄 기능을 나눴지만 소자 실증은 남았다
이번 연구의 새로움은 비카이랄 물질이 카이랄 배열을 만든 현상 자체에 있지 않다. 비카이랄 집합체의 카이랄 대칭 깨짐과 템플릿을 이용한 원편광 발광은 앞서 보고된 바 있다. 이번 연구는 전기장과 미세구속으로 3차원 결함을 만들고, 카이랄 첨가제로 방향을 선택한 뒤, 고분자 나노섬유로 고정하고, 비카이랄 발광체의 원편광 발광까지 연결했다. 복잡한 카이랄 발광분자를 새로 합성하는 대신 발광 기능과 빛의 회전 방향을 정하는 골격을 분리한 접근이다.
연구진은 약 560㎚에서 빛을 내는 비카이랄 PtN 인광체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 절댓값 약 0.02~0.03의 반대 부호 원편광 발광을 보고했다. 그러나 발광체 두 종류와 고정용 고분자 PPX-OH 한 종류로 확인한 소재 원리 증명이다. 다른 고분자와 발광체로 넓힐 수 있는 범용 플랫폼이 확립됐다고 보기는 이르다.
디스플레이와 광통신 등은 가능한 전망이지만 소자 실증은 하지 않았다. LED·OLED·픽셀·통신 송신기를 제작하지 않았고 휘도, 외부양자효율, 전력, 변조속도, 색좌표와 소자 수명도 측정하지 않았다. 같은 고체 시료에서 전압을 바꿔 좌우 원편광을 실시간 전환한 실험도 없다. 전기장은 제작 과정에서 배열을 만드는 데 사용됐고, 반대 부호는 R형과 S형 첨가제로 각각 만든 별도 골격에서 얻었다.
정량적인 공간 검증 범위도 200×200㎛²에 머물렀다. 독립 제작 시료 수, 배치별 성공률, 전체 필름 수율과 결함률은 제시되지 않았다. 세척 뒤 형상이 남은 것은 확인했지만 열·습도·광노화·보관기간·굽힘에 대한 장기 안정성 시험도 없다. 논문은 최종 교정 전 조기공개본이어서 본문과 그림 설명 등에 남은 수치 불일치는 최종본에서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미세한 좌우 차이를 실제 소자의 성능으로 이어가려면 대면적 재현성, 효율, 장기 수명과 전환 방식이라는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자료: KAIST·Nature Communicati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