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기억이 굳는 '그 찰나'를 붙잡다… 공포 엔그램의 핵심을 지목하다
생쥐가 전기 충격에 얼어붙던 그 몇 초, 오직 그 순간에만 불이 켜진 해마 세포들을 골라 표시해 두었다. 이튿날 아무 일도 없는 낯선 방에서 그 세포들만 빛으로 다시 켜자 생쥐는 또 얼어붙었다. 같은 학습에서 충격이 오기 전 방을 둘러보던 순간의 세포를 켰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과 파리 고등물리화학원(ESPCI) 연구진이 지난 3월 11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은, 하나의 기억 안에서도 '알맹이'와 '곁다리'가 갈린다는 것을 실험으로 갈라 보였다. 기억이 뇌에 남긴 물리적 흔적, 이른바 엔그램(engram)을 시간 축으로 잘라 해부한 결과다.
몇 시간짜리 도장, 몇 초짜리 셔터
엔그램에 이름이 붙은 것은 20세기 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과학자들은 학습하는 동안 켜진 세포에 표지를 달아 그 자리를 붙잡았고, 나중에 그 세포만 인위적으로 자극해 기억을 되살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2012년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이 해마의 엔그램 세포를 빛으로 자극해 공포 기억을 불러낸 실험이 그 출발점이다.
문제는 붙잡는 방식이었다. 표지를 다는 데 흔히 쓰인 초기 반응 유전자(c-fos 등) 방식은 세포가 활동한 뒤 표지 단백질이 쌓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번 논문은 그 표지 창이 "수 분에서 수 시간"에 이른다고 적었다. 학습 자체가 몇 분 만에 끝나는데, 그 몇 분을 통째로 뭉뚱그려 도장을 찍어 온 셈이다. 위협을 예감한 순간, 실제로 아픔이 닥친 순간, 몸이 굳어버린 순간이 한 봉투에 섞여 들어갔다.
지젤라 베테레 박사팀이 택한 도구는 f-FLiCRE다. 두 신호가 동시에 들어와야만 세포에 영구 표지가 남는 자물쇠처럼 작동한다. 하나는 세포가 발화할 때 안으로 쏟아지는 칼슘, 다른 하나는 연구자가 원하는 찰나에 뇌로 쏘아 넣는 파란빛이다. 빛을 언제 켜고 끄느냐가 곧 셔터 속도가 된다. 연구진은 배양한 해마 뉴런에 5초 켜고 5초 끄기를 반복해, 빛이 켜져 있는 동안 발화한 세포만 표지된다는 것을 먼저 확인했다. 도구를 개발한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의 크리스티나 김 교수도 논문에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 번의 학습을 네 장면으로 잘랐다
연구진은 단 한 번의 공포 학습을 네 구간으로 나눠 표지했다. 충격이 오기 전 방을 탐색하는 구간,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충격 뒤 몸이 굳는 순간, 그리고 굳지 않고 움직이는 순간이다. 얼어붙는 순간만 골라 빛을 쏘려면 사람이 지켜보다 스위치를 누르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연구진은 실시간으로 생쥐의 자세를 읽어 얼어붙음이 시작되면 자동으로 빛을 켜고 끄는 폐회로 장치를 붙였다.
표지가 이뤄진 곳은 등쪽 해마 CA1이다. 별도로 진행한 칼슘 영상 실험에서 네 집단이 서로 겹치는 비율을 재보니 평균 1% 남짓, 우연히 기대되는 수준보다도 낮았다.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세포 뭉치에 통째로 저장되는 게 아니라, 순간마다 다른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는 뜻이다.
켜야 아는 세포, 꺼야 아는 세포
결정적 물음은 그다음이었다. 이 조각들 가운데 어느 것이 기억의 알맹이인가. 아무 위협도 없는 낯선 방에서 각 집단에 빛을 쏘아 강제로 깨우자, '충격'과 '얼어붙음' 순간에 표지된 세포를 자극했을 때만 생쥐가 얼어붙었다. 충격 직전이나 움직이던 순간의 세포로는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맥락 탐색 시간을 8분으로 늘려 다시 해봐도 결과는 같았다.
반대 방향으로도 확인했다. 자극용 단백질 대신 억제용 단백질을 넣어 회상 도중 그 세포들을 잠재우자, 역시 '충격'과 '얼어붙음' 세포를 껐을 때만 공포 반응이 줄었다. 그 두 집단은 있어도 그만인 세포가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세포라는 뜻이다.
둘 사이에도 결이 갈렸다. 얼어붙던 순간의 세포는 빛을 끈 뒤에도 공포 반응이 원래 수준으로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학습 때 실제로 얼마나 오래 얼어붙었는지와 인공 회상의 강도가 비례한 것도 이 집단뿐이었다. 자연스러운 회상이 지닌 특징을 그대로 재현한 셈이다.
이 반응이 정말 '기억'인지도 따로 검증했다. 방에 넣자마자 충격을 줘 맥락과의 연합이 만들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같은 '충격' 세포를 표지해 재활성화하면 공포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 위 위협에 본능적으로 굳는 과제에서 표지한 '얼어붙음' 세포도 마찬가지였다. 굳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기억과 묶인 굳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에 남은 빈칸
물론 이 지도가 기억의 전부는 아니다. 생쥐가 아무 조작 없이 스스로 기억을 떠올릴 때는 네 집단 가운데 어느 쪽도 특별히 더 활발하지 않았다. 다만 같은 집단에 속한 세포끼리의 활동 상관은 '얼어붙음' 집단에서만 회상 때까지 유지됐다. 개별 세포를 하나씩 세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무리의 합주로만 드러나는 층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표지한 세포를 오래 강제로 자극하면 세포들이 원래와 다른 발화 패턴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선행 연구도 논문에 함께 적었다. 실험자가 켠 인위적 스위치와 뇌가 스스로 불러내는 회상 사이의 간극은 아직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회상 쪽이다. 학습이 아니라 이튿날 회상 도중에 표지한 세포들은 얼어붙던 순간이든 아니든 모두 재활성화 때 공포를 불러냈고, 서로 겹치는 비율도 15%가량으로 훨씬 높았다. 기억을 만들 때는 까다롭게 골라 뽑고, 꺼내 쓸 때는 느슨하게 함께 움직이는 셈이다.
한국은 '언제'가 아니라 '어느 연결'을 판다
기억의 물리적 실체를 쫓는 경쟁에서 국내 연구도 최전선에 있다. 다만 파고드는 축이 다르다. 프랑스 팀이 '언제 켜졌나'를 잘랐다면, 대전 기초과학연구원(IBS) 기억·글리아과학 연구단은 '어느 연결이 굵어졌나'를 본다.
이 연구단은 지난 1월 20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두 엔그램 세포 사이에 놓인 시냅스만 형광으로 비추는 dual-eGRASP 기법으로 복측 해마 CA1과 기저 편도체 사이를 들여다본 결과를 보고했다. 공포 학습은 엔그램끼리 잇는 시냅스의 밀도를 높이고 구조적으로 강화했다. 단백질 합성 억제제를 여섯 시간에 걸쳐 네 번 주입하자 자연 회상뿐 아니라 빛으로 강제한 인공 회상까지 사라졌다.
지난해 12월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린 같은 연구단의 논문은 시간 축을 더 좁힌다. 학습 직후 몇 분 안에 엔그램 세포 안에서 성장호르몬이 새로 만들어지는데, 이 번역을 막으면 해마 치아이랑의 엔그램 세포가 성숙하지 못했다. 찰나를 표지하는 프랑스식 접근과, 그 찰나에 무엇이 만들어지는지를 분자로 짚는 한국식 접근이 같은 문제의 양면을 밀고 있다.
기억을 만질 수 있게 된 시대의 계산서
베테레 박사는 연구의 출발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논문이 엔그램의 존재를 보여주었지만, 기억을 정지된 스냅숏처럼 다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 경험의 역동성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죠." 결론은 더 단호했다. "하나의 경험 동안 오직 특정한 일부 뉴런만이 기억을 이루도록 선택됩니다. 다른 뉴런은 인위적으로 활성화해도 기억을 불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이는 그 세포들의 기여가 엔그램 형성에 결정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논문은 결론에서 "엔그램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적었다. 연구진이 다음으로 잡은 목표는 선택된 세포들이 시간이 지나며 어떻게 재편되는지, 그리고 그 세포들이 남다른 분자적 특징이나 연결 구조를 가졌는지다. 설치류에서 확인된 결과가 다른 포유류와 사람에게도 통하는지는 아직 남은 검증이다.
기술이 앞서간 만큼 규범도 움직였다. 유네스코는 지난해 11월 12일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총회에서 194개 회원국이 참여한 가운데 신경기술 윤리 권고를 채택했다. 신경 데이터를 모을 때 "명시적 동의와 완전한 투명성"을 요구하고, "인간 정신의 불가침성"을 원칙으로 못 박은 첫 국제 기준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처럼 공포가 과잉 일반화되는 병에서 기억 전체를 지우지 않고 알맹이만 골라 다스리는 치료를 상상한다면 그 출발점은 이렇게 잘게 쪼갠 지도일 것이다. 다만 어느 조각이 알맹이인지 정확히 짚어낼수록, 그 조각을 골라 지우거나 덧씌우는 일도 함께 가까워진다. 지도가 정밀해지는 속도만큼 그 지도를 누가 어떤 조건에서 펴볼 수 있는지를 정해두는 일이, 이번 결과가 남긴 또 하나의 숙제다.
자료: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파리 고등물리화학원(ESPCI)·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네이처 뉴로사이언스), 기초과학연구원(IBS) 기억·글리아과학 연구단(PNAS·사이언스 어드밴시스), 유네스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