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만 맞히는 의료 AI 넘어 ‘회복의 경로’ 학습한다

의료 AI가 환자의 현재 점수만 맞히는 데서 나아가, 왜 그런 상태가 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했는지까지 배우도록 하자는 접근이 제시됐다. 환자의 회복을 하나의 결괏값이 아니라 시간과 맥락이 담긴 경로로 표현하자는 구상이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교수와 교신저자인 국립암센터 재활의학과 정승현 교수는 2026년 8월 25일 Frontiers in Digital Health에 관점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재활 AI의 표현 병목: 인간 인지 대리변수에서 경로 기반 임상 표현으로’이며, 연구진은 CRTC라는 개념적 설계 틀을 제안했다. 논문은 외부 연구비가 없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지적한 ‘표현 병목’은 복잡한 임상 현상을 AI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바꾸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가 빠지는 문제를 뜻한다. 현재 의료 AI는 기능 평가 점수처럼 특정 시점의 환자 상태를 하나의 값으로 단순화한 자료를 주로 학습한다. 그러나 기존 점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과 환자가 실제로 어떻게 회복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게 CRTC의 출발점이다.
예를 들어 같은 FMA 상지점수, 즉 팔의 운동기능을 평가한 수치를 받은 환자라도 움직임의 내용은 다를 수 있다. 실제 운동기능이 회복된 경우와 몸통이나 어깨를 이용해 부족한 움직임을 보상한 경우가 하나의 점수에서는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 연구진은 영상과 몸의 움직임을 재는 관성센서를 활용해 동작의 단계, 관절 사이의 협응, 피로에 따른 기능 저하를 나눠 학습하는 방식을 예로 들었다.
CRTC는 새로운 AI 알고리즘이나 임상시험 결과가 아니다. 데이터를 모으고 모델을 개발하기에 앞서, 어떤 임상 현상을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삼고 그 발생 과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정하는 설계 틀이다. 다시 말해 AI에 데이터를 많이 넣기 전에 무엇을 관찰하고 어떤 단위로 나눌지를 먼저 묻는 접근이다.
연구진은 이를 위해 9단계를 제시했다. 임상상황 포착, 현상 선택, 사건 분절, 발생경로 모델링, 시계열·그래프 등으로 표현, 임상 의미 연결, 계산가능 표현형 구성, AI 추론, 진료 환류의 순서다. 시계열은 변화를 시간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이고, 그래프는 사건과 요인 사이의 관계를 연결해 나타내는 방식이다. AI의 분석 결과가 다시 진료에 활용되는 과정까지 설계 범위에 넣었다.
경로 기반 표현을 평가하는 기준도 제안했다. 질환이나 회복의 기전과 관련이 있는지, 시간에 따른 궤적을 보존하는지, 환자의 맥락 변화에 반응하는지, 의료진이 임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기존 지표를 넘어 설명·예측 가치를 제공하는지, 측정 규모가 명확한지 등 6가지다.
디지털 표현형과 디지털 바이오마커, 멀티모달 AI, 디지털 트윈이 이미 수집된 데이터나 정해진 상태변수에서 출발한다면 CRTC는 그보다 앞단을 다룬다. ‘무슨 임상 현상을 어떤 발생경로로 표현할 것인가’를 먼저 정함으로써, 숫자로 압축되기 전 환자의 변화 과정을 데이터 설계에 남기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의료 AI의 데이터 품질과 검증을 중시하는 제도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의료 AI 규제에서 데이터 품질과 대표성, 외부 검증, 사용목적 명시, 전 생애주기 문서화를 강조한다. 미국 식품의약국과 Health Canada, 영국 의약품건강관리제품규제청의 의료기기 머신러닝 지침도 목표 환자군을 대표하는 학습·시험 데이터와 인간-AI 팀의 성능을 요구한다.
국내에서는 디지털의료제품법이 2025년 1월 24일 시행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26년 업무계획에서 AI 학습데이터 품질관리 지원, 디지털의료기기 성능기준의 표준화·인증, 재활치료 디지털치료기기 평가기술 지침 마련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CRTC는 이런 검증에 앞서 AI가 측정할 임상 현상과 변화 경로부터 명확히 구성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자료: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국립암센터, Frontiers in Digital Health, 세계보건기구(WHO), 미국 식품의약국(FDA), Health Canada, 영국 의약품건강관리제품규제청(MHRA), 식품의약품안전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