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혈액 한 방울로 잡아낸 '침묵의 암'... AI가 읽어낸 췌장암 초기 신호

건강검진에서 흔히 뽑는 피 한 방울 속에는 몸속 세포들이 쉼 없이 흘려보내는 아주 작은 신호들이 숨어 있다. 그 신호를 인공지능(AI)이 읽어내 '침묵의 암'이라 불리는 췌장암을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잡아낼 수 있다면 어떨까. 미국 City of Hope 연구진이 이 질문에 실마리를 내놓았다. 연구진은 혈액 한 번 채취로 몸속을 떠도는 순환 마이크로RNA, 세포가 분비하는 나노 크기 막소포인 엑소좀 속 마이크로RNA, 기존 종양표지자 CA19-9까지 세 가지 신호를 AI로 하나의 위험도 점수로 통합하는 액체생검 'PANXEON'을 개발했다. 이 검사로 아직 증상이 없는 1·2기(초기) 췌장암을 86.8%(흔히 "87%"로 언급됨) 정확도로 찾아냈다는 국제 다기관 검증 결과가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슨(Nature Medicine)에 2026년 9월 16일 발표됐다.
왜 이렇게 늦게 발견될까
췌장암은 특유의 증상이 거의 없어 조용히 자란다. 국가암정보센터(중앙암등록본부)가 2019~2023년 집계를 바탕으로 낸 통계를 보면, 국내 췌장암 환자의 43.3%가 이미 다른 장기로 퍼진 뒤에야 처음 발견되는데, 이는 모든 암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다. 발견 시점이 늦어질수록 생존 확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5년 상대생존율은 암이 췌장 안에 국한된 단계에서는 47.8%지만, 원격전이 단계에서는 2.4%로 20배 가까이 벌어진다. 국내 연간 발생자 수는 9,748명으로 암종 중 8위, 전체 5년 상대생존율은 17.0%에 그친다. 해외에서도 사정은 비슷해 5년 생존율이 약 14%에 머물고, 환자의 약 90%가 이미 진행되거나 전이된 뒤 진단받는다는 인용이 있다. 지금 병원에서 쓰는 혈액 속 종양표지자 CA19-9만으로는 초기 단계를 잘 잡아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이번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피 한 방울에서 세 가지 신호를 동시에 읽다
PANXEON의 핵심은 서로 다른 세 가지 혈액 신호를 하나의 패널로 합쳤다는 데 있다. 우편함에 도착한 편지만 확인하던 것(CA19-9)에서 나아가, 택배 상자 안에 숨겨진 쪽지까지 열어보는 것(엑소좀 속 마이크로RNA)에 비유할 수 있다. 세 명의 서로 다른 목격자 증언을 AI가 한 번에 종합해 판단하는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순환 마이크로RNA와 엑소좀 마이크로RNA, CA19-9를 함께 측정해 AI로 통합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보도됐다. 이 연구는 완전히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같은 연구진이 2022년 292명 규모로 발표했던 13개 마이크로RNA 패널 연구를 계승·확장한 것이다. 검사 대상은 일반 인구 전체가 아니라 유전성 위험 인자나 가족력이 있거나, 췌장 낭종·만성 췌장염을 앓아 이미 의료 감시를 받고 있는 고위험군이다. 연구팀 스스로도 이 검사가 확진 검사가 아니라 '위험 신호'이며, MRI나 내시경초음파 같은 기존 영상검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고위험군 선별을 보완하는 도구라고 규정했다. 일반 인구를 대상으로 한 선별검사로 쓰기에도 아직 이르다고 밝혔다.
4개국 12개 기관, 숫자로 본 성적표
이번 검증에는 미국·일본·이탈리아·한국 4개국 12개 기관이 참여했다. 참여 인원은 자료에 따라 1,785명 또는 1,649명(혈장 샘플 1,757개)으로 다르게 표기돼 있어 어느 쪽이 논문의 최종 수치인지 원문 대조로는 확정하지 못했다. 핵심 성적표는 1·2기 초기 췌장암 검출 민감도 86.8%다. 위양성률은 검사 대상 집단에 따라 크게 갈렸는데, 평균 위험군에서는 3.2%(약 3%)였지만 고위험군에서는 15.6%(약 16%)로 약 5배 높았다. 이미 위험군으로 분류된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가짜 경보가 더 자주 울린다는 뜻이어서, 검사 정확도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암이 되기 전 단계인 고도이형성증(이른바 '0기')도 64.3% 검출했는데, 이 수치를 낸 하위 표본이 19명에 그친다는 보도가 있어 표본이 작다는 점을 함께 감안해야 한다. 마이크로RNA 신호만 따로 보면 판별력(AUROC)이 테스트 코호트에서 88.6%, 1·2기 민감도는 83.8%였다. 전체 판별력은 테스트 코호트 88.6%, 외부 검증 코호트 91.7%(위험군별로는 평균위험 93.7%, 고위험 86.6%로 나뉜다는 자료도 있음) 두 가지 수치가 코호트를 달리해 보도돼,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넘어야 할 산들
연구진 스스로 밝힌 한계도 적지 않다. 고도이형성증 코호트가 작았을 뿐 아니라 이미 수술을 받은 환자가 섞여 있었고, 히스패닉·흑인 등 인종 다양성의 대표성이 부족했다. 분자 신호가 임상 진단보다 얼마나 앞서 나타나는지도 이번 연구만으로는 알 수 없으며, 코호트 간 연령 차이도 존재했다. 외부 전문가들의 시선은 신중하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Baptist Health 소속 종양내과 전문의는 민감도는 유망하지만 고위험군에서의 특이도 개선이 더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역시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Cleveland Clinic 소속 종양내과 전문의는 선별검사에는 민감도·특이도보다 양성예측도가 중요하며 임상 도입에는 80%대가 아니라 90%대 중반의 민감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기 발견만으로는 부족하고 더 나은 치료법이 함께 나와야 하며, 실제 임상 도입까지 10~20년이 더 걸릴 수 있다고도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훈련 단계에서 판별력이 97~98%까지 나와 과적합 가능성이 제기됐고, 검사 비용이 CT의 3~4배로 추정되며, 고위험 낭종군의 정확도가 오히려 저위험군보다 낮게 나오는 역설적 결과도 지적됐다. 이해상충 문제도 짚어볼 대목이다. 2022년 선행 논문에는 이해상충이 없다고 명시됐지만, 이번 논문에서는 교신저자가 벨기에 소재 진단기업의 유급 자문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해당 기업이 이 기술을 인수할 수 있는 옵션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분 보유인지 인수 옵션 계약인지, 구체적 조건은 확인되지 않았다. 엑소좀을 이용한 액체생검 분야에서는 2015년 발표된 다른 바이오마커 연구가 이후 독립 검증에서 처음 수치가 그대로 재현되지 않아 2022년 정정이 게재된 선례도 있다. 이는 PANXEON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이 분야 전반에 있었던 맥락으로, 이번 연구가 같은 문제를 겪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가 곧바로 병원 현장에 도입될 확진 검사나 전 국민 대상 선별검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신 이미 의료 감시를 받고 있는 고위험군에서 영상검사를 보완할 수 있는 도구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이번 검증에 한국을 포함한 4개국 12개 기관이 참여한 만큼, 향후 더 큰 규모의 전향적 연구를 통해 위양성률을 낮추고 검사의 실제 임상적 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어질지 지켜볼 대목이다.
자료: City of Hope, Nature Medicine, 미국 국립암연구소(NCI), 이탈리아암연구협회(AIRC), 국가암정보센터(중앙암등록본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