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자기 무게 100만 배를 들고 젤로 변한다…한 고분자에 새긴 ‘8개 재료 상태’

유일혁 기자 · 입력 2026.10.15 06:56
PCL–PEO–PCL의 수분·결정·배향을 조절해 31개 전환 경로 구현…재활용 가능성은 산업 공정이 아닌 물리적 재가공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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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thetic Head

머리카락보다 훨씬 가벼운 0.3 mg짜리 미세섬유가 작은 음료 캔 정도인 300 g 추를 지탱했다. 섬유 길이는 10 cm였고, 들어 올린 질량은 자기 질량의 정확히 100만 배였다. 같은 고분자는 단단한 섬유로만 머물지 않았다. 특정 상태의 재료를 60℃ 물속에서 가열한 뒤 물속에서 상온까지 냉각하자 영률이 0.88 GPa에서 0.1 MPa로 낮아졌다. 영률은 재료를 당기거나 누를 때 얼마나 변형을 버티는지를 나타내는 강성의 척도다. 변화 폭은 8,800배였다.

다만 이 결과가 강철보다 100만 배 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중 시연은 가느다란 단일 미세섬유에서 나온 질량비이고, 8,800배 연화도 물과 열을 이용한 특정 경로의 결과다. 연구의 핵심은 기록적인 숫자 하나보다, 한 종류의 고분자를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여러 재료처럼 전환하도록 설계했다는 데 있다.

여덟 재료가 아니라 한 재료의 여덟 상태

중국 화남이공대 연구진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Robert J. Hickey 연구진은 이중결정성 ABA형 삼중 블록공중합체를 이용한 ‘다중상태 재료 회로’를 발표했다. 논문은 2026년 1월 19일 투고돼 9월 17일 채택됐으며 10월 6일 온라인 공개됐다.

사용한 고분자는 양쪽 말단이 폴리카프로락톤(PCL), 가운데가 폴리에틸렌옥사이드(PEO)인 PCL-b-PEO-b-PCL이다. 표기는 C400O1818C400이며 PEO 질량비는 46.5%다. 물속에서는 물을 꺼리는 소수성 PCL 말단이 구형 미셀을 만든다. 미셀은 분자들이 모여 이룬 작은 덩어리다. 반대로 친수성 PEO는 물을 머금는 연속적인 바탕을 이룬다. 한 고분자 사슬의 두 PCL 말단이 이웃한 미셀을 잇기 때문에, 공유결합으로 영구 고정하지 않고도 그물의 연결점인 물리적 가교점으로 작동한다.

연구진은 PCL과 PEO 각각의 결정화도와 결정 배향을 2×2 행렬에 배치했다. 결정화도는 사슬이 얼마나 규칙적으로 정돈됐는지, 결정 배향은 그 정돈된 구조가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를 나타낸다. 상태는 비정질인 Am, 방향이 정렬되지 않은 결정 NC, 중간 배향 결정 MC, 고배향 결정 HC로 구분했다. 이를 조합해 하이드로젤 NC′Am·NCAm·MCAm과 건조 상태 NCNC·NCHC·MCMC·MCHC·HCHC 등 여덟 대표 상태를 만들었다.

여기서 ‘회로’는 전기가 흐르는 전자회로가 아니다. 물속 냉각과 가열, 상온 수화, 건조, 변형을 가한 건조, 냉간 연신 등 여덟 가지 자극을 이용해 여덟 상태 사이를 오가는 31개 경로를 연결한 설계도에 가깝다. 지하철 노선에서 같은 역들이 여러 이동 경로로 이어지듯, 동일한 고분자가 받은 처리 순서에 따라 서로 다른 구조와 물성을 저장하는 방식이다.

강한 상태와 충격을 받아내는 상태는 달랐다

건조 상태의 영률은 0.13~0.88 GPa, 공학적 인장강도는 42~388 MPa였다. 공학응력은 잡아당기기 전 원래 단면적을 기준으로 계산한 값이다. 이 가운데 HCHC의 공학적 인장강도는 388 MPa, 인성은 441 MJ/m³였다. 인성은 재료가 끊어질 때까지 흡수할 수 있는 에너지의 크기다. HCHC에서는 PCL과 PEO의 결정화도가 각각 35.0%와 89.8%였는데, 두 값은 각 블록 자체 질량을 별도 기준으로 계산했으므로 더해서 해석할 수 없다.

가장 강한 상태가 충격 완화에도 항상 가장 좋은 것은 아니었다. NCHC는 한 부분이 가늘어지며 길게 늘어나는 목줄어듦을 이용해 충격력을 최대 94% 줄였고, 특정 시험에서 HCHC보다 충격에너지를 최대 3배 흡수했다. 단단하게 버티는 재료와 찌그러지며 충격을 받아내는 자동차 범퍼의 역할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 이 비교는 25 g 추를 5 cm 높이에서 떨어뜨린 소형 섬유 시험이며, 실물 방탄 성능을 뜻하지 않는다.

NCNC 시편은 목줄어듦과 변형경화를 거치며 최종 길이가 초기 길이의 약 16배가 됐고, 실제로 줄어든 단면적을 반영한 진응력은 최대 738 MPa에 이르렀다. 이는 원래 단면적으로 계산한 HCHC의 388 MPa와 기준과 상태가 다른 수치다. 하이드로젤의 영률은 0.1~1.8 MPa였고, MCAm 상태의 강도는 8.8 MPa였다.

물과 열, 당김으로 내부 질서를 다시 짰다

연구진은 새로운 화학반응으로 상태를 바꾸지 않았다. 같은 고분자 안에서 수분 함량, 두 블록의 결정화도와 사슬 배향을 물·열·건조·인장으로 조절했다. 고분자 용액을 물에 빠르게 주입해 비용매 유도 미세상분리를 일으켜 미세섬유를 만들었다. 비용매 유도 미세상분리는 고분자가 잘 녹지 않는 액체를 만나면서 아주 작은 영역으로 나뉘어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형성된 미셀 구조는 소각 X선 산란(SAXS)과 음성 염색 투과전자현미경(TEM)으로 살폈다. 결정화도와 결정 배향은 광각 X선 산란(WAXS), 비정질 사슬의 배향 차이는 편광 푸리에변환 적외선 분광법(FT-IR)으로 조사했다. SAXS 측정에는 상하이 싱크로트론 방사광시설의 BL10U1·BL16B1·BL19U2 빔라인이 쓰였다.

HCHC를 60℃ 물속에서 가열한 뒤 물속에서 상온까지 냉각해 NC′Am으로 바꾸는 연화는 논문 표현상 ‘수초 이내’에 일어났다. 정확한 초 수는 제시되지 않았다. 반면 25±1℃에서 미세섬유를 일정 질량까지 공기 건조하는 데는 통상 8~10분이 걸렸다. 모든 상태 전환이 수초 만에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수화에 따른 부피변형률도 약 170~800%로 컸다. 최대치에서는 부피가 약 9배가 되는 변화여서 구동에는 유리할 수 있지만, 치수를 유지해야 하는 구조부품에는 제약이 될 수 있다.

재료는 수축행정 최대 80%, 발생응력 최대 18.7 MPa, 에너지 밀도 최대 300 J/kg도 나타냈다. 다만 세 수치는 각각의 최대값이며 같은 시편과 같은 조건에서 동시에 달성됐다고 볼 수 없다. 논문이 제시한 골격근의 행정 40%, 응력 0.35 MPa, 에너지 밀도 39 J/kg과의 비교도 동일 장치에서 수행한 일대일 시험은 아니다.

‘재활용 가능’과 ‘산업 재활용 완료’ 사이

이 재료에는 영구적인 화학 가교나 충전제가 없다. 따라서 물리적 구조를 풀어 초기화하고 고분자를 다시 가공하기 쉬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것이 논문에서 말하는 재활용성이다. 폐제품을 수거하고 세척해 오염물을 분리한 뒤 반복 재성형하는 산업 재활용 공정을 검증한 것은 아니다. 반복 재가공 횟수와 회수율, 분자량 저하, 용매·에너지 투입량, 전 과정 환경성도 확인되지 않았다.

반복성 시험에서는 NCAm과 NCNC 사이의 전환을 100회 넘게 수행해도 성능 저하가 관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최대 8,800배 강성 차이를 보인 HCHC와 NC′Am 사이의 반복시험도, 31개 경로 전체의 내구성 시험도 아니다.

공개 동료심사에서는 변형 유도 결정화와 수분에 따른 고분자 물성 변화가 이미 알려졌다는 신규성 비판이 나왔다. 연구의 새로움은 새로운 물리현상을 처음 발견했다기보다 결정화도와 배향을 하나의 상태 공간으로 묶고 31개 전환 경로로 조직한 설계 틀에 가깝다. 저자들도 네 변수만으로 물성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결정화도와 결정 배향이 비슷해도 비정질 영역의 사슬 배향에 따라 응력과 변형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장이 결정화도와 배향을 함께 높이는 등 변수들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조절되지 않았다.

현재 결과는 미세섬유를 이용한 실험실 개념증명이며 주요 측정은 대체로 독립 시편 3개로 이뤄졌다. 굵은 섬유 다발이나 직물, 판재로 키웠을 때 자기 질량 100만 배라는 비율이 유지되는지는 알 수 없다. 장기 피로와 크리프, 자외선·세탁·마찰·야외 노화 자료도 없다. 수분이 강한 건조 상태를 연하게 만드는 만큼 땀·습기·체액에 노출되는 제품에서는 기능과 위험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봉합사와 상처 폐쇄 패치도 개념증명 단계이며 동물시험, 생체적합성, 독성, 조직반응, 멸균 안정성, 임상시험은 보고되지 않았다.

논문 공개 후 9일이 지난 2026년 10월 15일 현재 다른 연구팀의 독립 재현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 다중상태 재료 회로가 보여준 것은 완성된 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고분자 안에 강한 섬유와 충격 완화재, 부드러운 젤의 역할을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 꺼내는 설계 가능성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 정교한 미세섬유의 지도를 더 크고 오래 쓰는 재료에서도 그대로 펼칠 수 있느냐다.

자료: 화남이공대·펜실베이니아주립대·상하이 싱크로트론 방사광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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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혁 기자 ih.yoo@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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