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끓는 물의 증기 앞에서도 투명도를 지킨다…물길을 미세패턴으로 새긴 김서림 방지 하이드로겔

유일혁 기자 · 입력 2026.10.18 06:36
30㎛ 미세기둥 사이로 응축수를 모아 물막으로 전환…97℃ 물 수조 시험서 광학 선명도 상관값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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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국이나 채소를 끓이는 냄비에 유리 뚜껑을 덮으면 안쪽이 금세 뿌옇게 흐려진다. 투명한 유리가 갑자기 불투명해진 것은 수증기 자체가 앞을 가려서만은 아니다. 표면에 맺힌 수많은 둥근 물방울이 작은 렌즈처럼 빛을 제각기 꺾고 흩뜨리기 때문이다. 국제 공동연구진은 이 물방울을 밀어내는 대신 서로 연결해 물막으로 만들고, 빠져나갈 길까지 마련하는 김서림 방지 표면을 개발했다.

연구진이 선택한 재료는 친수성 폴리에틸렌글리콜 디아크릴레이트(PEGDA) 하이드로겔이다. 물과 잘 어울리는 젤 형태의 재료 표면에 지름 30㎛, 간격 30㎛, 높이 30㎛인 원통형 미세기둥을 규칙적으로 배열했다. 제목처럼 ‘물길을 새겼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 구조는 홈을 파낸 수로가 아니다. 미세기둥 사이의 빈 공간이 응축수를 연결하고 옮기는 물길로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ETH Zurich를 중심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MIT),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Solabs Nanotechnology GmbH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공동 제1저자 박현철은 논문에 ETH Zurich와 KIST 극한물성소재연구센터 소속으로 병기됐다. 연구 결과는 2023년 10월 12일 접수돼 2026년 9월 9일 채택됐으며, 10월 17일 온라인 공개됐다.

물을 피하지 않고 ‘잘 젖는 길’을 만들다

일반 투명 표면에서는 응축된 물방울마다 공기·물·기판의 곡면 경계가 생긴다. 빛은 이 경계를 지날 때 여러 방향으로 산란하고, 표면 너머의 영상은 흐려진다. 반면 비교적 균일하게 이어진 물막은 둥근 물방울의 집합보다 빛의 산란과 영상 왜곡이 작다. 이번 기술의 출발점은 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물이 맺히는 모양을 바꾸는 데 있다.

과정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하이드로겔 내부의 나노다공성 구조, 즉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구멍들이 초기 수증기를 흡수한다. 하이드로겔이 포화되면 표면에 미세한 물방울이 생긴다. 이어 인접한 물방울들이 기둥 사이에서 연결되고, 모세관 작용, 즉 좁은 틈이 물을 스스로 끌어들이는 힘에 의해 빈 공간을 채운다. 이후 들어오는 응축수도 둥근 방울로 크게 자라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연속 물막에 합류한다. 기둥 높이를 넘은 물은 표면의 경사와 중력의 도움을 받아 가장자리로 배출된다.

이 때문에 표면은 처음부터 계속 맑은 것이 아니다. 초기 미세방울이 생기는 동안에는 흐려졌다가, 기둥 사이가 물로 채워진 뒤 선명도를 회복한다. 일반 표면에서 물이 넘치는 ‘범람’은 성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이 구조에서는 기둥 사이를 먼저 채워 연속 물막을 유지하는 과정으로 이용됐다. 물을 튕겨내는 우산보다는 욕실 거울 위에 눈에 잘 띄지 않는 배수망을 놓은 데 가깝다.

눈에는 작고 물방울에는 충분히 큰 30㎛

기둥 크기는 물방울을 통제하는 능력과 사람이 보는 선명도 사이의 절충 결과다. 연구진은 200㎜ 거리에서 사람 눈이 구별할 수 있는 크기를 약 58㎛로 계산했다. 30㎛ 구조는 그보다 작아 정상적인 관찰 거리에서 개별 기둥이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물방울의 성장과 연결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머리카락 굵기의 절반 이하에 해당하는 구조가 물에는 길이 되고 눈에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셈이다.

무조건 더 깊은 구조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공개 프리프린트 기준으로 연구진이 비교한 높이 1㎛ 구조는 물방울 성장을 충분히 제한하지 못했다. 반대로 81㎛ 구조에서는 두꺼워진 물·하이드로겔층과 남은 기포 때문에 영상 대비가 낮아졌다. 지름·간격·높이를 각각 30㎛로 맞춘 대표 구조는 물방울을 가두는 부피와 광학 손실 사이에서 선택된 값이다.

제작에는 여러 단계의 실험실 공정이 쓰였다. PEGDA를 탈이온수에 70중량%로 조제하고 광개시제를 3중량% 첨가했다. 기판은 산소 플라스마와 실란 용액으로 전처리해 접착력을 높였다. 포토리소그래피로 실리콘 원형을 만든 뒤 PDMS 몰드로 복제하고, PEGDA 전구체에 350㎚ 자외선을 5분 조사해 굳혔다. 정밀한 미세구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지만, 제곱미터급 유리에 값싸고 빠르게 적용할 대면적 코팅 공정이 완성됐다는 뜻은 아니다.

97℃ 물 위 10분, 93%가 뜻하는 것

대표 비교시험에서 연구진은 97℃의 액체 물이 담긴 가열 수조 위에 관찰창을 수평면에서 45° 기울여 놓았다. 창에서 10㎜ 떨어진 체커보드를 촬영하면서 10분 동안 얻은 각 영상 프레임을 김이 서리기 전 기준 영상과 비교했다. 이 조건에서 미세패턴 하이드로겔은 정상상태 광학 선명도 상관값 93%를 기록했다. 상용 초친수성 처리는 76%, 무처리 유리는 32%, 상용 초소수성 처리는 11%였다.

여기서 93%는 빛의 93%가 통과했다는 광투과율이 아니다. 기준 체커보드 영상과 시험 중 영상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나타내는 피어슨 상관계수다. 특정 장치와 표적을 이용한 영상 유사도이므로 자동차 유리나 안경, 산업안전 제품의 합격률로 읽어서는 안 된다. 97℃ 역시 코팅 표면의 온도가 아니라 수조 속 액체 물의 온도다. 연구진은 60℃와 83℃ 조건도 시험했고 세 조건 모두에서 미세패턴 하이드로겔의 정상상태 선명도가 가장 높았다고 보고했다.

총 가시광 투과율은 대조 필름과 패턴 하이드로겔 모두 건조·습윤 상태에서 약 90%였다. 그러나 빛이 흐릿하게 퍼지는 정도인 헤이즈에서는 차이가 나타났다. 대조 폴리에스터 필름은 건조 상태 3.8%에서 습윤 상태 75%로 크게 높아졌다. 패턴 하이드로겔은 건조 19.4%, 습윤 18.5%로 변화가 작았다. 증기 속에서는 흐려짐을 억제했지만, 평소 건조 상태에서는 대조 필름보다 이미 더 뿌연 손실을 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활 조건을 보여주는 시연에서는 당근과 주키니를 넣고 끓인 냄비의 투명 뚜껑 일부에 표면을 적용했다. 뚜껑을 덮은 직후 패턴 부분을 포함한 전체가 몇 초 동안 흐려졌다. 이후 패턴 부분은 30초 안에 다시 내부가 보였지만 무처리 부분은 계속 뿌옇게 남았다. 다만 이는 곡률에 따른 국부 경사가 20° 미만인 뚜껑에서 한 생활환경 시연으로, 정량 비교시험과 같은 표준시험은 아니다.

‘김이 안 서리는 표면’보다 정확한 의미

이번 결과의 의미는 김이 전혀 생기지 않는 표면을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다. 생긴 응축수를 빛 산란이 큰 둥근 방울에서 비교적 균일한 연속 물막으로 빠르게 바꾸고, 기둥 사이와 가장자리로 이동시키는 설계 원리를 제시했다는 데 있다. 하이드로겔의 나노기공과 인공적인 30㎛급 미세기둥이 서로 다른 크기에서 역할을 나눠 맡았다.

제품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검증할 항목이 많다. 대표 정량시험은 45°로 기울인 작은 창에서 10분간 진행됐다. 완전히 수평인 렌즈나 배수할 가장자리가 없는 넓은 창에서도 같은 성능이 유지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긁힘과 마찰, 반복 세척, 세제, 먼지와 기름 오염, 자외선, 황변, 열사이클에 관한 수명 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관찰 대상이 표면에서 멀어질수록 선명도가 낮아지는 현상도 보고됐다.

처리 능력에도 경계가 있다. 가장 강한 시험 조건에서 응축수 유입량은 11㎣/s였고 모세관 이송률은 계산상 13.5㎣/s로 약 23% 높았다. 이 수치는 작동 여유를 보여주지만 더 강한 응결에서도 제한 없이 성능이 이어진다는 증거는 아니다. 냄비 뚜껑 시연 역시 광개시제와 미반응 성분을 포함한 완제품의 식품접촉 안전성을 입증하지 않는다.

ETH Zurich는 관련 유럽 특허를 출원했고 주요 저자 두 명이 발명자로 기재됐다. 원자료도 공개됐지만, 정식 논문 공개 다음 날 기준으로 독립 연구진의 재현 결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앞으로 내구성, 건조 상태의 광학 품질, 방향 의존성, 완제품 안전성, 대면적 생산비와 수율을 검증해야 이 미세한 물길이 실험실 밖에서도 오래 작동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자료: ETH Zurich·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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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혁 기자 ih.yoo@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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