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원자층이 미끄러지며 기억한다…4인치 rBN 박막으로 3나노초 전환

겹쳐 놓은 카드 한 장을 옆으로 살짝 밀었더니 카드의 배열이 바뀌고, 손을 뗀 뒤에도 그 상태가 남는다고 생각해 보자. 중국 베이징대학교 중심 공동연구진은 이와 비슷한 움직임을 원자층에서 일으켜 정보를 기억하는 소자를 만들었다. 재료는 능면체 질화붕소(rBN)다. 연구진은 사파이어와 니켈–붕소(Ni–B) 성장 주형 위에 지름 4인치, 즉 101.6mm 규모의 rBN 단결정 박막을 반복 성장시키고 이를 다른 기판으로 옮겨 비휘발성 메모리 소자와 배열을 제작했다고 보고했다. 전원을 꺼도 정보가 남는 비휘발성 기억을 3나노초, 10억분의 3초 수준에서 전환한 결과다. 이 시간 동안 빛이 진공에서 이동하는 거리는 약 90cm다.
여기서 말하는 웨이퍼는 4인치짜리 질화붕소 덩어리나 완성된 메모리칩이 아니다. 두께 5~45nm의 rBN 단결정 박막을 성장 주형 위에 넓게 만든 결과물이다. 4인치 원판의 면적은 약 81cm²로 컵받침과 비슷한 크기다. 연구의 무게는 최고속도 기록보다 작은 박리 조각과 수작업 조립에 머물던 슬라이딩 강유전체를 성장 박막과 전계효과트랜지스터 배열로 넓혔다는 데 있다.
층의 위치가 바뀌면 0과 1이 남는다
rBN은 붕소와 질소 원자가 얇은 층을 이루고, 그 층들이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어긋난 ABC 순서로 포개진 물질이다. 외부 전기장을 걸면 층들이 서로 옆으로 미끄러져 ABC와 CBA 적층 상태를 오갈 수 있다. 이때 수직 전기분극, 즉 물질 안에서 양전하와 음전하의 중심이 갈라지는 방향도 반전된다. 전압을 제거한 뒤에도 분극 방향이 남기 때문에 두 상태를 디지털 정보의 0과 1로 읽을 수 있다. 이를 슬라이딩 강유전체라고 부른다.
연구진은 금속–rBN–금속 구조의 분극–전기장 이력곡선과 스위칭 전류를 측정하고, 탐침으로 국소 반응을 읽는 압전힘현미경(PFM), 전압 인가 전후의 단면 주사투과전자현미경(STEM) 관찰, 그래핀과 이황화몰리브덴(MoS₂) 채널을 사용한 강유전체 전계효과트랜지스터(FeFET)의 전기적 판독을 함께 적용했다. 일반적인 육방정 질화붕소(hBN) 대조 소자에서는 같은 종류의 이력과 스위칭 전류 피크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극히 얇은 물질의 PFM 신호는 정전기력이나 전하 주입, 표면 흡착물의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연구진은 여러 측정과 대조군을 결합해 한 가지 측정법에서 생길 수 있는 오인을 줄였다.
더 안정한 hBN을 피해 단결정을 키운 계단
넓은 면적의 rBN을 만드는 일은 층을 얇게 쌓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연구진의 계산과 기관 발표에 따르면 rBN의 형성에너지는 더 안정한 비강유전성 hBN보다 원자 하나당 약 2밀리전자볼트 높다. 성장 도중 더 안정한 hBN 구조로 가기 쉽다는 뜻이다. 각 층의 결정 방향뿐 아니라 층 사이가 미끄러질 방향까지 맞아야 넓은 면적에서 ABC 적층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난제였다.
연구진은 계단 구조가 있는 m면 사파이어 위에 Ni–B 합금막을 마그네트론 스퍼터링으로 형성했다. 스퍼터링은 원자를 표면에 날려 보내 얇은 막을 입히는 공정이다. 사파이어의 미세한 계단은 Ni–B 표면에도 복제됐고, 이 계단이 처음 생기는 BN 결정립의 성장 방향과 층간 이동 방향을 나란히 맞추는 주형 역할을 했다. 연구진은 이 방법을 ‘계단 주형 계면 에피택시’라고 명명했다. 반대로 m면이 아닌 c면·a면 사파이어를 쓰거나 1,050℃에서 2시간 성장시킨 대조조건에서는 주로 hBN이 나타났으며, 연구진은 이를 표면 계단이 rBN 적층을 안정화한다는 근거로 해석했다.
단결정성과 상 순도는 주사전자현미경, 원자힘현미경, 저에너지전자회절, 전자후방산란회절, X선 회절, 라만 분광, 제2고조파 발생(SHG), 전자회절과 고해상도 전자현미경 등으로 교차 확인했다. 약 15nm 두께 rBN의 SHG 세기는 1,064nm 빛을 조사한 조건에서 단층 BN의 약 2,000배였다. 서로 다른 10개 성장 배치도 원자힘현미경과 분광 분석 등으로 비교했다. 다만 이는 배치 간 재현성을 보여주는 자료이지, 웨이퍼의 모든 지점이나 제작된 모든 소자가 정상이라는 수율 자료는 아니다.
23억 회와 10만 회, 서로 다른 성적표
연구진이 보고한 배열의 온·오프비는 평균 약 3×10⁵, 최대 10⁶이었고 평균 메모리 창은 2.5V였다. 메모리 창은 저장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문턱전압의 간격이다. 최소 채널 길이는 30nm로 머리카락 굵기의 수천분의 1에 해당한다. 이 30nm 소자에서는 메모리 창이 최고 약 4V, 온·오프비가 약 10⁴로 나타났다. rBN 두께가 10.6nm일 때 메모리 창은 1.7V였고, 40.3nm에서는 4.4V였다.
온도 473K, 약 200℃에서 시험한 소자는 약 4V의 메모리 창과 약 10³의 온·오프비를 보였다. 물이 끓는 온도보다 약 100℃ 높은 조건이지만, 완제품 칩의 장기 고온 신뢰성을 입증한 시험은 아니다. 잔류분극은 약 1.3μC/cm², 절연파괴 전계는 약 10MV/cm로 보고됐다. 면내 열전도율은 320W·m⁻¹·K⁻¹였다.
성능 수치는 시험 대상을 구분해 읽어야 한다. rBN 재료·시험소자에서 보고한 반복 내구성은 2.3×10⁹회, 23억 회다. 그러나 이 숫자는 웨이퍼 배열의 모든 셀이 견딘 횟수가 아니다. rBN/MoS₂ 웨이퍼 기반 FeFET 배열의 별도 반복시험 값은 10⁵회였다. 2024년 박리하고 수작업으로 조립한 이중층 BN 소자에서는 이미 나노초급 전환과 10¹¹회 이상의 반복 동작이 보고됐다. 따라서 이번 결과를 슬라이딩 강유전체의 최초 또는 최고 속도·내구성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10년 기억’과 12인치로 가는 거리
전환 시험에는 1나노초부터 10마이크로초까지의 펄스가 사용됐지만, 대표 성능값은 3나노초다. 3나노초 미만에서는 측정기 대역폭 한계로 펄스가 약해지고 파형이 일그러졌다. 따라서 1나노초 쓰기·읽기가 완전하게 입증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 보존 성능도 실제 관찰 구간은 10⁵초, 약 27.8시간이었다. 10년 보존은 하루 남짓 측정한 변화 추세를 수학적으로 연장한 외삽 예측이다. 습도와 열순환, 읽기 교란, 장기간 고온 열화까지 확인한 결과는 아니다.
상용화까지는 크기와 공정의 간극도 남아 있다. 4인치는 현재 첨단 반도체 생산에 널리 쓰이는 300mm 웨이퍼보다 지름이 약 3분의 1이고 면적은 약 9분의 1이다. rBN 박막은 Ni–B와 사파이어 위에서 성장한 뒤 소자 기판으로 옮겨야 하므로 주름과 균열, 잔류물, 계면 오염과 대면적 전사 수율을 검증해야 한다. 기존 CMOS 생산라인의 열 예산과 금속 오염 관리, 300mm 장비 조건에 맞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전체 셀 수와 정상 작동 셀의 비율, 비트 오류율, 결함밀도, 제조원가와 비트당 쓰기 에너지 역시 공개 자료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원자층의 미끄러짐이라는 물성을 손으로 조립한 작은 조각에서 지름 10cm 규모의 성장 박막과 소자 배열로 옮겼다는 의미가 있다. 다음 관문은 더 큰 웨이퍼에서도 같은 결정 방향과 적층을 유지하고, 전사와 소자 제작을 거친 뒤에도 결함과 성능 편차를 통제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는 일이다. 빠른 한 번의 전환보다 수많은 셀이 오랜 시간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는지가 실제 메모리 기술의 성패를 가르게 된다.
자료: 베이징대학교·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중국과학원 둥관재료과학기술연구소·지식재산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