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보이지 않는 ‘환경의 기억’을 읽자, 미세 입자의 에너지 장부가 달라졌다

젤리 위에서 구슬을 굴린 뒤 다시 제자리로 가져왔다고 생각해 보자. 구슬은 처음과 같은 곳에 있지만, 젤리에 남은 눌림과 뒤틀림까지 처음과 같지는 않다. 그 흔적은 잠시 뒤 구슬을 다시 밀 수도 있다. 지름 2.7μm의 실리카 입자를 점탄성 유체에 넣은 연구진이 읽어낸 것도 이와 비슷한 ‘기억’이었다. 여기서 기억이란 의식이나 디지털 기록이 아니라, 유체 내부 구조에 남은 시간 상관관계다.
연구진은 보이지 않는 유체 구조를 직접 촬영하지 않았다. 대신 입자의 위치를 약 1초 간격으로 두 번 측정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 구별했다. 사진 한 장이 현재 위치만 보여준다면, 시간차를 둔 두 장은 입자가 어디에서 왔는지까지 알려주는 셈이다. 이 작은 차이를 이용하자 연구진은 입자–환경계에서 기계적 일을 추출할 수 있었다. 특정 이력 상태에서는 기억 없는 계를 가정해 계산한 기준보다 추출한 일이 최대 약 3배에 이르렀다.
현재가 같아도 과거가 다르면 미래가 달랐다
로케시 무루가, 펠릭스 지노, 사라 A. M. 루스, 클레멘스 베힝거 연구진은 ‘숨은 자유도에서 일 추출’ 연구를 2026년 10월 16일 공개했다. 콘스탄츠대학교와 막스플랑크 동역학·자기조직화연구소 연구진이 참여했다. 실험에는 지름 2.7μm의 실리카 입자와 CPyCl·NaSal을 각각 8mM로 섞은 등몰 점탄성 미셀 용액, 빛으로 입자를 붙잡는 광학집게가 쓰였다.
미셀은 분자들이 모여 만든 작은 집합체다. 이 실험의 벌레 모양 미셀들은 서로 얽힌 네트워크를 이뤘다. 입자가 움직이면 주변 네트워크가 변형되고, 입자가 원래 위치로 돌아와도 변형은 즉시 사라지지 않았다. 이 조건에서 미셀 구조가 풀려 평형으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구조 완화시간은 약 6초였다. 과거 상태의 영향이 남아 현재 상태만으로 다음 움직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비마르코프성이라고 한다.
한 번의 위치 측정만으로는 이 숨은 상태를 따로 알아낼 수 없다. 측정값이 눈에 보이는 입자 위치에만 의존한다면 환경에 관한 별도 정보가 더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를 피하려고 시간차를 둔 두 번의 이진 측정을 했다. 각 측정에서 입자가 70nm 문턱의 어느 쪽에 있었는지에 따라 이력을 |00⟩, |01⟩, |10⟩, |11⟩의 네 상태로 나눴다. 두 기호는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측정 결과를 나타낸다.
같은 출발선에서 드러난 ‘숨은 되밀림’
과거가 정말 영향을 줬는지 확인하려면 단순히 서로 다른 입자 집단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 시작 위치부터 다르면 이후 움직임의 차이가 환경의 기억 때문인지 위치 차이 때문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연구진은 두 번째 측정 직후의 입자 위치분포가 실제 이력 집단과 같도록 맞추되, 과거 이력은 무시한 대조 집단을 다시 표집했다.
출발 당시 보이는 입자 위치분포는 같았지만 이후의 완화 과정은 달랐다. 두 분포 사이 차이를 재는 KL 발산의 감소 양상도 달라졌다. KL 발산은 두 확률분포가 얼마나 다른지를 나타내는 척도다. 현재의 입자 위치만 같게 맞춰도 미래가 달라졌다는 사실은, 직접 보이지 않는 미셀 상태가 입자 운동에 영향을 줬음을 보여줬다.
특히 |10⟩ 상태에서는 입자의 평균 퍼텐셜에너지가 곧바로 줄지 않고 한동안 증가했다. 연구진은 이를 미셀 환경의 숨은 자유도에 있던 에너지가 입자로 되돌아온 신호로 해석했다. 환경에서 입자로 정보와 에너지가 되돌아오는 효과를 나타낸 정보 역류 지표 Φ(δt)는 측정 간격 δt가 약 1초일 때 뚜렷한 최대를 보였다. 간격이 0에 가까우면 구별할 이력이 충분히 생기지 않았고, 너무 길면 첫 측정과 환경 사이의 상관관계가 사라졌다. 약 1초는 모든 기억 물질에 통하는 시간이 아니라, 구조 완화시간이 약 6초인 이 용액과 해당 측정 조건에서 얻은 값이다.
‘최대 약 3배’가 뜻하는 것과 뜻하지 않는 것
연구진은 두 번째 측정 뒤 광학집게가 만드는 단일 조화 퍼텐셜을 옮겨 기계적 일을 추출했다. 조화 퍼텐셜은 입자가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되돌리는 힘이 커지는, 그릇 모양의 에너지 지형이다. 실험의 트랩 강성은 0.50~40μN/m 범위였다. 각 상태의 일 추출 결과는 약 100개 프로토콜의 평균으로 평가했다.
δt가 1초인 |10⟩ 상태에서 추출한 일은 같은 관측 상태를 가진 기억 없는 마르코프계의 강체이동 최적 한계 Wm*보다 최대 약 3배 컸다. Wm*는 해당 조건부 상태의 평균 위치를 바탕으로, 퍼텐셜 모양을 바꾸지 않고 통째로 옮길 때 마르코프계가 낼 수 있는 최적값이다. 입자의 순간 퍼텐셜에너지 전체나 입자와 환경에 저장된 총에너지를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결과는 입자와 환경 전체의 에너지 한계를 세 배 넘어섰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측된 입자만 살핀 장부에서 빠져 있던 미셀 환경과 입자–환경 상관관계의 비평형 자유에너지가 일로 전환됐다. 주머니 속 돈만 세면 가진 것보다 많이 쓴 듯 보이지만 외투 안감에 별도 지갑이 있었던 것과 같다. 전체 계의 초과 자유에너지가 궁극적인 한계이므로 열역학 제2법칙을 어기지 않는다.
상태에 따른 차이도 중요하다. |10⟩은 Wm/Wm*라는 정규화 비율이 가장 컸지만, 절대적으로 추출한 일은 |11⟩에서 가장 컸다. |00⟩에서는 평균 일이 계속 음수여서 일을 추출하지 못했다. 환경에 기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언제나 더 많은 일을 얻는 것은 아니며, 어떤 이력을 골라 언제 제어하느냐가 핵심이었다.
새 발전기가 아니라, 숨은 에너지를 읽는 개념검증
실험은 25℃에서 진행됐고 입자 위치는 초당 100프레임, 곧 0.01초마다 약 ±5nm의 분해능으로 추적됐다. 2.7μm 입자는 머리카락 굵기를 70μm로 잡으면 약 26분의 1 크기다. 이 온도에서 열운동의 에너지 척도인 kBT는 약 4.1×10−21J이다. 거대한 새 에너지원을 만든 것이 아니라, 열운동 수준의 미세한 에너지 흐름을 구별하고 회수한 실험이다.
의의는 환경을 직접 들여다보지 않고도 시간차를 둔 측정으로 그 흔적을 읽어 열역학적 자원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데 있다. 그러나 입자 한 개와 특정 인공 미셀 용액, 두 번의 이진 측정, 퍼텐셜의 강체이동만을 시험한 개념검증이다. 환경의 자유에너지를 모두 회수한 것도, 측정·계산·피드백·광학집게 구동과 기억 초기화 비용을 포함한 장치 전체의 순에너지 이득을 입증한 것도 아니다.
독립 재현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논문 공개 후 5일이 지난 2026년 10월 21일 기준으로 다른 연구실이나 다른 유체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는 남은 질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보이는 입자의 현재만으로 에너지 장부를 끝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줬다. 환경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과거의 흔적을 잠시 품을 수 있고, 그 흔적을 읽을 적절한 시간 창을 찾으면 다시 일로 꺼내 쓸 수 있다.
자료: 콘스탄츠대학교·막스플랑크 동역학·자기조직화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