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전압을 뒤집자 회전도 뒤집혔다…전류로 움직이는 단분자 ‘아르키메데스 나사’

금 전극 두 개 사이에 수 나노미터 규모의 나선형 분자 한 개를 걸어 전류를 흘렸다. 전원의 극성을 바꾸자 A→B→C→A로 이어지던 전류 신호가 A→C→B→A의 역순으로 나타났다. 전선이면서 동시에 모터인 분자 한 개가, 전압의 방향에 맞춰 돌아가는 방향까지 바꾼 셈이다.
국제 공동연구팀은 이 현상을 전자가 나선형 분자를 지나면서 회전을 일으킨 결과로 해석했다. 분자가 실제로 도는 모습을 촬영한 것은 아니다. 어두운 방에서 사람을 보지 못한 채 발소리가 들리는 순서로 이동 방향을 알아내듯,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전류 준위의 순서로 분자의 운동을 추론했다.
연구 결과는 논문 「Current-Driven Molecular Machine with Rotation-Enhanced Conductance」로 2026년 10월 22일 공개됐다. 연구에는 코펜하겐대의 분자 합성, 바이츠만과학연구소의 단분자 접합 실험, 아우크스부르크대의 밀도범함수이론과 양자수송 계산, 코펜하겐대 닐스보어연구소와 화중과기대의 비평형 수송·랑주뱅 모델이 결합됐다.
회전 영상 대신 전류의 ‘순서’를 읽었다
연구진은 양끝에 다이티오아세틸 결합기를 붙인 나선형 [13]헬리센 단분자를 황 원자를 통해 두 금 전극에 연결했다. 기계식 파단접합 방식으로 만든 이 구조에서 분자는 전류가 지나가는 통로 그 자체가 됐다. 연구진은 전극 간격을 0.1nm보다 작은 단위로 조절하며 분자를 늘이거나 압축하고, 전압과 시간에 따른 전류를 측정했다.
실험 온도는 4.2K, 약 영하 268.95℃였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장치를 다루기 위해 액체헬륨 온도에 가까운 환경을 사용한 원리증명이다. 국소 발열 때문에 분자의 유효온도는 이보다 조금 높을 수 있다.
낮은 전압에서는 분자가 특정 자세에 잠시 머물다가 다음 자세로 넘어가는 것으로 해석되는 전류 점프가 나타났다. 각 전류 준위는 서로 다른 회전각에서 형성되는 준안정 구조, 즉 완전히 안정하지는 않지만 한동안 머물 수 있는 분자 자세에 대응했다. 체류시간 분포는 지수감쇠 형태를 보였다. 연구진은 이를 분자가 에너지 장벽을 확률적으로 한 단계씩 넘는 포아송 과정과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세 개 이상의 전류 상태가 있으면 A→B→C와 A→C→B를 구별할 수 있다. 실제로 전압 극성을 반전하자 전류 준위가 순환하는 순서도 반대로 바뀌었다. 다만 라세미 혼합물, 즉 좌우 나선형 분자가 섞인 시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특정 나선 손잡이성을 절대적인 시계·반시계 방향과 소자별로 대응시킨 결과는 아니다.
가만히 있을 때 피하던 자세가 전자의 고속도로였다
연구진의 설명에서 회전을 만드는 힘은 전류 유도 비보존 토크다. 전자가 나선형 분자를 통과하며 회전 방향의 힘을 전달하고, 전압 극성이 바뀌면 그 힘의 방향도 바뀐다. ‘아르키메데스 나사’라는 표현은 이 나선형 구조와 토크 전달을 설명하는 비유다. 물을 퍼 올리는 실제 아르키메데스 나사처럼 물질이나 전자를 퍼 올리는 펌프 기능을 입증한 것은 아니다.
문턱전압을 넘자 실험에서 전류가 최대 약 100배 급증했다. 이는 모든 접합에서 나타난 보편적인 증가율이 아니라 관측된 급증의 상한이다. 연구진은 외부 전압이 공급한 에너지로 토크가 회전 장벽과 마찰 손실을 이기면서, 단계적으로 움직이던 분자가 연속회전 영역으로 넘어간다고 해석했다.
계산은 분자가 회전하는 동안 정지 상태에서는 거의 머물지 않는 고전도 각도를 지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가만히 있을 때는 에너지상 불리해 피하던 자세가 전자에게는 넓은 통로였던 셈이다. 계산된 회전각별 전도도는 최대 두 자릿수 차이를 보였다. 실험에서 관측한 것은 전류의 급증이고, 계산이 제시한 것은 자세에 따른 전도도 변화다.
고전압에서 예상한 회전 속도는 10∼100GHz, 초당 약 100억∼1,000억 회전이다. 그러나 이 속도는 직접 촬영하거나 시간분해해 계측한 값이 아니다. 전류 급증과 저전압 전이의 변화, 비나선형 대조군, 밀도범함수이론·양자수송·랑주뱅 계산을 종합해 얻은 모델 예측이다. 따라서 이번 결과를 초당 1,000억 회전을 실측한 모터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모두 같은 방향’이 아니라 122개에서 읽힌 방향
숫자의 분모도 주의해야 한다. 316개는 전체 제작 또는 측정 시도 수가 아니다. 200mV를 넘는 전압에서 2∼5개의 전류 상태가 나타나 집계된 접합 수다. 이 가운데 두 상태만 보인 접합은 194개로, 앞뒤 순환을 구별할 수 없었다. 세 상태를 보인 접합은 86개, 네 상태는 25개, 다섯 상태는 11개였다.
방향을 판정할 수 있었던 접합은 세 상태 이상을 보인 122개, 집계된 316개의 38.6%였다. 제한된 관측시간 동안 이 122개에서 기록된 전이는 모두 한쪽 순환 순서를 따랐고 역순 전이는 검출되지 않았다. 이것이 이 연구에서 말할 수 있는 방향성의 정확한 범위다. 두 상태만 보인 194개에서는 방향을 알 수 없었으며, 200mV 이상에서도 검출 가능한 점프가 전혀 없었던 접합은 316개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수가 공개되지 않아 전체 제작수율이나 전체 시도 대비 성공률은 계산할 수 없다.
역회전 확률이 물리적으로 0이라는 뜻도 아니다. 열적 요동이 있는 계에서 충분히 오래 관측하면 역방향 전이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에 연구진도 동의했다. 관측된 단방향성은 정해진 측정시간 안에서 확인된 결과이며, 무한한 시간에 걸쳐 보장된 절대적인 방향성이 아니다.
비교를 위해 사용한 길이와 전도도가 비슷한 비나선형 π-공액 다이티올 안트라센 분자는 순환 전류점프와 고전압의 급격한 전류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나선형 구조가 핵심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대조만으로 헬리센의 곁사슬과 원자 종류, 전극 결합 효과를 하나씩 분리해 검증한 것은 아니다. 전압 반전에 따른 순서 변화만으로 전자의 각운동량 전달이 독립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어서, 연구진은 대조군과 전극 간격 변화, 구조·수송 계산을 함께 근거로 제시했다.
상용 모터가 아니라 전기와 운동을 잇는 원리증명
기존 단분자 전기모터는 주로 표면 위의 분자를 주사터널링현미경 탐침으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이번 연구에서는 분자 자체가 두 전극 사이의 전류 경로가 됐다. 전기 입력이 분자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이 다시 전기전도를 바꾸는 연결을 단일 접합 안에서 구현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하지만 작동 여부는 접합의 원자구조에 민감했다. 계산된 대표 회전 장벽은 결합구조에 따라 약 10meV∼1eV 범위로 달랐다. 금 원자가 어느 위치에 결합하느냐에 따라 작동과 문턱전압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고전압에서는 전류 급증 뒤 분자가 빠져나가거나 금 원자 접촉이 생기는 징후도 보고됐으며, 개별 접합의 정확한 파괴 전류는 통제하지 못했다.
실온이나 공기 중 작동, 반복수명, 대량 제조, 전체 제작수율, 회로 집적과 유용한 기계적 출력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과거 다른 나선형 분자 접합에서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구조와 조건이 결정적인지도 남은 질문이다. 발표 이틀 뒤인 2026년 10월 24일 기준으로는 독립 연구팀의 재현 결과나 재현 실패 보고도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분자 스위치와 센서, 스핀트로닉스, 미세유체 분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는 완성된 응용품이 아니라 앞으로 검증해야 할 전망이다. 이번 성과의 현재 위치는 극저온에서 전류와 분자 운동, 전도 변화를 한 장치 안에 연결해 보인 원리증명이다. 분자 한 개가 실제 회로 속 기계로 자리 잡으려면, 보이지 않는 회전을 더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오래 견디며 일정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남아 있다.
자료: 《Nature》, 바이츠만과학연구소, 아우크스부르크대, 코펜하겐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