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구비 심사대에 정치가 앉는다 — 미국 과학지원 개편안, 상원에서 제동

유일혁 기자 · 입력 2026.08.04 16:45 · 수정 2026.08.20 14:50
44개 연방기관 전체에 적용되는 규칙안…'국내 우선' 조항은 해외 공동연구의 문턱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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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D.C.의 연방의회 의사당. 상원 세출위원회가 과학지원 개편 규칙의 시행을 유예하는 법안을 냈다. (사진 출처=위키미디어 커먼스, 퍼블릭 도메인)

연구비를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마지막 관문에, 과학자가 아니라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가 앉는다. 미국 백악관 예산관리국(OMB)이 지난 5월 29일 공고한 연방 재정지원 규칙 개정안의 핵심이다. 이 규칙안은 특정 부처 한 곳이 아니라 국립과학재단(NSF)·보건복지부·에너지부·항공우주국(NASA)을 포함한 44개 연방기관 전체에 적용된다. 미국 연방 연구비의 지급 방식을 한꺼번에 바꾸는 시도다.

이 규칙안은 지금 미국 의회에서 제동이 걸리는 중이다. 연방 지출을 관장하는 상원 세출위원회가 규칙 시행을 12월 11일까지 막는 조항을 담은 법안을 내놨다. 정부 셧다운을 막는 것이 이 법안의 주된 목적이지만, 그 안에 과학지원 개편을 유예하는 장치가 함께 들어갔다.

'사전 검토'라는 새 관문

규칙안이 신설하려는 것은 발급 전 검토(pre-issuance review)라는 단계다. 규칙 원문은 각 기관장이 "한 명 이상의 고위 임명직(senior appointee)을 지정해 모든 재량 지원금에 대한 발급 전 검토를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적었다. 재량 지원금은 법으로 배분 방식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기관이 심사해 선정하는 지원금으로, 대부분의 경쟁형 연구비가 여기 해당한다.

이 검토에서 적용할 원칙도 규칙안에 명시됐다. 첫 번째 원칙은 "재량 지원금은 해당되는 경우 대통령의 정책 우선순위를 입증 가능하게 진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에도 각 기관은 동료평가를 포함한 심사(merit review)를 해왔지만, 그 위에 정치적 임명직이 수행하는 별도 관문이 하나 더 얹히는 구조다. 규칙안은 이 조항이 행정명령 14332호에 따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과학계가 우려하는 지점은 심사의 무게중심이다. 연구비 심사는 그동안 같은 분야 전문가들이 연구의 타당성과 방법을 따지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여기에 정책 부합 여부를 판단하는 단계가 최종 관문으로 들어오면, 무엇이 지원받을 만한 연구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국내 우선'과 해외 공동연구

한국 연구자에게 더 직접적인 조항은 따로 있다. 규칙안은 연구개발 지원금의 수혜 자격을 이렇게 제한한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연방 지원금은 미국·주·부족정부 법률에 따라 설립된 기관에 지급되어야 한다. 연방기관은 법률이 명시적으로 허용하거나, 기관의 임무와 행정부의 우선순위, 미국에 긴요한 이익이 존재한다고 고위 임명직이 판단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국 기관에 연구개발 지원금을 지급할 수 없다."

연구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지원서를 평가할 때도 '국내 우선 체계(domestic-first framework)'를 적용하도록 했다. 국제적 요소는 그것이 정당하고 프로그램 목적에 부합하며 미국의 국익에 맞는다고 기관이 판단할 때만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칙안은 그 판단 기준으로 해당 국제 협력이 과학적·기술적 목표 달성에 필요한지, 미국 내에서 확보하기 어려운 전문성·시설·데이터·연구 대상 집단·환경 조건에 접근하게 해주는지 등을 들었다.

바꿔 말하면 미국 밖의 연구기관이 미국 연방 연구비에 참여하는 일이 원칙적으로 막히고, 예외로만 열린다. 국제 공동연구가 표준이 된 분야일수록 영향이 크다. 다만 이 조항이 실제로 어느 범위까지 적용될지는 각 기관이 규칙을 어떻게 해석하고 시행하느냐에 달려 있어, 현재로서는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공화당에서도 나온 반대

이 규칙안에 대한 반대는 야당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메인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 수전 콜린스는 이 규칙이 "과학 및 생명의학 연구를 약화시키고, 연방 재정지원 절차에 대한 의회의 통제권과 충돌한다"고 밝혔다. 연방 예산을 심의하는 위원회를 이끄는 위치에서 나온 발언이다. 하원에서는 민주당 의원 125명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과학 옹호 단체들은 상원 세출위원회 법안을 환영했다. 보건 연구 옹호 비영리단체 리서치!아메리카의 러스 폴슨 대표는 이 법안이 "정부를 계속 열어둘 뿐 아니라 과학의 진전을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 정책을 다루는 아사드 람자날리는 연구개발을 정치적 임명직이 관장하게 하는 방안을 두고 "미국의 과학 리더십에 재앙"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시행이 실제로 유예되려면 절차가 남아 있다. 상원 세출위원회 법안은 상원 본회의를 통과한 뒤 하원에서도 지지를 얻어야 하고, 양원을 모두 통과해야 대통령 서명으로 법률이 된다. 결과는 확정적이지 않지만, 다수 의원이 선거를 앞두고 있어 셧다운을 피하려는 압력이 크다는 점을 낙관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규칙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규칙안이 아직 제안 단계라는 점이다. 규칙안은 5월 29일 공고됐고 의견 접수는 7월 13일 마감됐다. 최종 규칙으로 확정되면 그때부터 효력이 생긴다. 즉 현재는 '무엇이 바뀔 수 있는가'를 보는 단계이지, 이미 바뀐 제도를 보는 단계가 아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예산을 둘러싼 대치로 셧다운이 벌어져 국립보건원(NIH)을 비롯한 연구비 지원 기관들이 신규 지원금 발급 같은 업무를 중단한 바 있다. 이번 법안의 일차 목적도 그런 사태를 막는 데 있다. 과학지원 개편 유예는 그 법안에 함께 실린 조항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공공 연구비를 운용하는 나라이고, 그 배분 규칙은 국경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연구비 심사에 정치적 판단을 공식 단계로 넣는 시도와 국제 협력을 예외로 돌리는 조항이 최종 확정될지, 의회가 이를 어디까지 제어할지가 앞으로의 관전 지점이다.

이미 한 부처에서 겪은 일…NIH의 '해외 하위연구비' 차단

규칙안이 새 발상은 아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2025년 5월 1일 '해외 하위연구비에 관한 개정 정책'을 공고했다. 미국 기관이 받은 연구비의 일부를 해외 공동연구기관에 다시 나눠 주던 방식, 곧 하위연구비를 새 구조가 마련될 때까지 받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후속 공고는 해외 협력기관이 NIH에서 직접 별도의 지원을 받는 구조를 제시했고, 시행 목표 시점은 2025 회계연도가 끝나는 그해 9월 30일로 잡혔다. 진행 중인 과제에 소급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단서가 붙었다.

규모는 작지 않다. 국내 보도로 집계된 바로는 최근 회계연도의 해외 하위연구비가 3,600여 건, 4억 달러를 넘었고 한국 기관 몫은 최근 2년간 약 710만 달러였다. 한 기관에서 먼저 시행된 방식이 44개 연방기관 전체로 넓어지는 것이 이번 규칙안이다.

미국은 국제 협력을 예외로, 한국은 항목에서 뺐다

한국 쪽 대비 태세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부는 2025년 8월 22일 2026년도 주요 연구개발 예산 배분·조정안을 발표하며 총 35조3,000억 원을 배정했다. 이 가운데 글로벌 R&D는 전년보다 1.1%, 200억 원가량 줄었다. 브리핑에 나선 과학기술혁신조정관은 "글로벌 R&D를 무슨 기초연구나 지역이나 이런 반도체와 같이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를 가지고서 숫자 관리를 하지는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제 협력은 모든 연구 과정에 섞여 들어가는 것이지 따로 떼어 관리할 분야가 아니라는 취지다.

두 변화가 겹치면 결과는 분명해진다. 미국은 국제 협력을 원칙에서 빼고 예외로 열어 두는 쪽으로, 한국은 국제 협력을 별도 항목으로 세지 않는 쪽으로 갔다. 한미 공동연구의 자금 경로가 양쪽 모두에서 개별 과제 단위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뜻이다. 어느 협력이 끊겼는지, 그래서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집계할 창구도 그만큼 흐려진다.

자료: 미국 백악관 예산관리국, 연방관보, 미국 상원 세출위원회, 국립과학재단·미국 국립보건원(NIH)·과학기술정보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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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혁 기자 ih.yoo@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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