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휴머노이드 골드러시, 완성체에 돈이 몰릴 때 한국은 관절과 데이터를 잡아라
매출은 거의 없는데 몸값이 390억 달러(약 54조 원)인 회사가 있다. 그 옆에서는 이미 흑자를 내는 중국 로봇 회사가 상장 청약을 받는다. 지난달 말 미국 매체 테크타임스가 두 회사를 나란히 세워 붙인 제목이 지금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시장의 온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돈은 완성체로 쏠린다. 사람을 닮은 몸통과 두 팔, 걷는 다리를 갖춘 로봇 한 대의 시연 영상이 수조 원을 움직인다. 그런데 그 로봇이 실제로 물건을 집고 라인에 서게 만드는 힘은 화면에 잡히지 않는 곳에 있다. 관절 속 부품과, 로봇이 삼키는 현장 데이터다. 골드러시에서 오래 살아남는 쪽은 언제나 삽을 판 사람이었다.
몸값과 실적 사이에 벌어진 틈
상징은 미국의 피겨AI(Figure AI)다. 이 회사는 2025년 9월 시리즈C 라운드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모으며 기업가치 39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로봇 스타트업 한 곳에 붙은 값으로는 전례가 드물다. 그러나 반년도 지나지 않아 미국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은 '피겨, 390억 달러 몸값과 함께 따라붙은 의문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숫자를 되짚었다.
대비는 올여름 더 선명해졌다. 중국 유니트리(Unitree)가 지난 7월 말 공모 청약에 들어가면서, 시장은 '이익을 내는 중국 로봇 제조사'와 '매출이 사실상 없는 390억 달러 미국 스타트업'을 같은 화면에 올려놓게 됐다. 같은 달 미국 테크크런치는 상장을 앞둔 한 휴머노이드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가정용 로봇이 곧 나온다고는 약속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목으로 뽑았다. 앞서 지난해 말 미국 CNBC는 일론 머스크가 휴머노이드가 어디에나 있는 미래를 그리지만 그것을 먼저 현실로 만드는 쪽은 중국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화려한 시연과 매년 반복되는 '올해는 양산' 약속 사이에서, 시장의 질문은 이미 옮겨갔다. 얼마나 잘 걷느냐가 아니라 몇 대를, 얼마에, 계속 만들 수 있느냐다. 지난 6월 토스증권이 중국 현지를 취재해 내린 결론도 같았다. 승부처는 양산력이라는 것이다.
병목은 두뇌가 아니라 관절에 있다
양산을 가로막는 것은 뜻밖에도 알고리즘이 아니다. 컨설팅사 맥킨지가 휴머노이드를 다룬 두 번째 보고서의 제목을 보면 초점이 어디로 옮겨갔는지 알 수 있다. 2025년 10월에는 '개념에서 상업적 현실로 건너가기'였지만, 올해 4월 보고서는 '휴머노이드 공급망 제약을 수십억 달러 기회로 바꾸기'였다. 여섯 달 만에 화두가 '가능한가'에서 '부품을 댈 수 있는가'로 바뀐 것이다.
관절을 움직이는 액추에이터(모터와 감속기, 구동부를 하나로 묶은 관절 구동장치)와 그 안의 감속기(모터의 빠른 회전을 느리고 힘센 회전으로 바꿔주는 부품)는 오랫동안 일본 업체들이 사실상 독점해 온 영역이다. 손가락 다섯 개로 물건을 쥐는 로봇 손도 마찬가지다. 두뇌를 만드는 회사는 늘었지만, 관절과 손을 정밀하게 대량으로 찍어내는 곳은 여전히 손에 꼽힌다. 국내 업계에서 "로봇 성장의 열쇠는 액추에이터 국산화"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다.
국내 현황, 예산 1000억 원 대 선전시 9000억 원
정부의 판단도 다르지 않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5년 4월 10일 40여 개 산학연이 참여하는 'K-휴머노이드 연합'을 출범시키고 2030년까지 1조 원 이상을 투자해 휴머노이드 최강국으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어 지난해 5월에는 'AI 자율제조' 사업을 'AI 팩토리'로 전면 개편하면서 제조 현장에 휴머노이드를 투입하는 실증을 추진하기로 했다.
문제는 규모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지난 7월 13일 휴머노이드 예산을 두고 중국 선전시 한 곳이 9000억 원인데 한국은 전체가 1000억 원이라는 취지로 격차를 지적했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반도체를 두고 "국가 생존 전쟁"이라며 경쟁국 이상의 재정 지원을 예고했다. 앞서 1월에는 한동안 끊겼던 로봇 예산이 다시 편성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7월 초에는 기획예산처 장관이 직접 휴머노이드 업계와 간담회를 열었다. 격차를 인지한 시점이 늦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다만 시간차는 이미 벌어져 있다. 지난해 4월 포브스코리아가 '미·중은 양산, 한국은 연구'라고 요약한 구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완성체 대수 경쟁에서 정면 승부를 걸기에는 판돈의 자릿수가 다르다.
그래도 한국이 쥔 두 장, 감속기와 제조 데이터
다행히 판이 완성체 하나로만 갈리지는 않는다. 부품 국산화는 눈에 띄게 속도를 냈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3월 자사 휴머노이드에 국산 감속기를 채택하기로 했고, 감속기 국산화를 이끌어 온 에스피지는 지난 6월 로봇 전시회에서 "모든 로봇 기업의 러브콜을 받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에스비비테크는 하모닉 감속기를 넘어 액추에이터로 개발 범위를 넓혔고, 패러데이다이나믹스도 액추에이터 국산화에 뛰어들었다. 힘을 감지하는 센서를 만드는 에이딘로보틱스는 지난해 말 핵심 부품 자립화 공로를 인정받았다. 로보티즈는 지난 3월 다섯 손가락을 갖춘 휴머노이드 200대 공급 계약을 알렸다.
또 하나의 광맥은 부품보다 조용하다. 로봇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려면 사람의 손동작과 공정 현장을 담은 방대한 학습 데이터가 필요한데, 이 현장 데이터는 완성체 사양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 과소평가되기 쉽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라인을 촘촘히 돌리는 한국은 이 데이터의 산지다. 정부도 여기에 손을 댔다. 산업부는 지난 6월 기업이 유출 걱정 없이 제조 데이터를 모으고 쓸 수 있게 하는 '클린룸'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데이터를 내놓기 두려워하는 제조 현장의 문턱을 낮추는 장치다.
완성체는 세계가, 관절과 데이터는 한국이
공식 자료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미 한 곳이다. 맥킨지는 올해 보고서에서 공급망 제약 자체를 수십억 달러짜리 기회로 규정했고, 산업부 장관은 예산 격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부품·실증 쪽에 무게를 실었다. 두 진단을 겹치면 결론은 단순해진다. 완성체 몸값 경쟁의 화제성에 휘둘려 '한국도 390억 달러짜리 로봇 회사를 만들자'고 나서는 순간, 자릿수가 다른 판돈 앞에서 지는 싸움이 된다.
대신 걸어야 할 곳은 둘이다. 세계 어느 완성체 회사도 우회할 수 없는 감속기·액추에이터 공급망에 이름을 올리는 일, 그리고 제조 현장 데이터를 모아 쓰는 규칙을 먼저 만들어 두는 일이다. 남은 과제도 분명하다. 국산 감속기가 시제품 채택을 넘어 양산 물량을 감당할 수 있는지, 클린룸이 실제로 데이터를 흐르게 할지는 앞으로 몇 년의 실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완성체는 세계가 만들되 그 관절과 데이터는 한국이 판다 — 골드러시의 교훈은 그때도 지금도 같다.
자료: 산업통상자원부, K-휴머노이드 연합, 맥킨지앤드컴퍼니, 현대자동차, 에스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