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미생물·세포가 약이 된다…'살아있는 치료제'의 시대가 열린다
약이란 오랫동안 '분자'였다. 아스피린도 항암제도 실험실에서 합성한 화합물 한 종류다. 몸에 들어가면 정해진 표적에 붙었다가 사라지는, 죽어 있는 물질이다. 그런데 지금 의학의 최전선에서는 스스로 증식하고 신호를 감지하고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 곧 살아있는 생명체 자체를 약으로 쓰는 흐름이 임상 문턱을 넘고 있다.
암을 냄새 맡듯 찾아가는 박테리아, 환자 몸에서 떼어내 배양한 뒤 다시 이식하는 장기(臟器)의 축소판, 장 속에 자리 잡아 대사물질을 만드는 세균까지. 공통점은 하나다. 약효를 내는 주체가 죽은 분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포와 미생물이라는 점이다. '살아있는 치료제(리빙 테라퓨틱스)'라 불린다.
죽은 분자가 못 하는 일
합성 신약은 강력하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약이 몸 전체를 돌기 때문에 정작 병소에 닿는 양은 일부이고 나머지는 부작용으로 돌아온다. 표적이 하나로 고정돼 상황에 따라 세기를 조절하지도 못한다. 살아있는 치료제는 이 판을 뒤집는다. 산소가 부족한 종양 내부처럼 특정 환경을 스스로 인식해 그곳에서만 작동하고, 증식하며 약효를 늘리고, 유전자 회로를 심어 '언제 무엇을' 내놓을지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이 개념이 공상이 아니라는 것은 규제당국이 먼저 인정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22년 11월 페링의 '리바이오타'를, 2023년 4월 세레스의 '보스트'를 잇따라 승인했다. 둘 다 반복성 클로스트리디오이데스 디피실(C. difficile) 장 감염을 겨냥한 생균 치료제로, 살아있는 미생물 군집을 그대로 약으로 만든 세계 첫 사례다.
효과는 수치로 남았다. 보스트의 3상에서 8주 안에 감염이 재발한 환자는 치료군 89명 중 11명(12.4%), 위약군 93명 중 37명(39.8%)이었다. 열 명 중 넷이 다시 앓던 것이 한 명 남짓으로 줄었다. 미생물이 정식 '의약품'의 지위에 오른 순간이었다.
독성 유전자 73개를 뽑아낸 균주
가장 대담한 시도는 박테리아를 항암제로 쓰는 것이다. 일부 세균이 산소가 희박한 종양 깊숙한 곳을 좋아해 그곳에서 증식한다는 성질을 역이용한다.
이 발상 자체는 오래됐다. 2002년 미국 연구진은 독성을 약화한 살모넬라를 전이성 흑색종 환자에게 정맥으로 투여해, 일부 환자의 종양에서 실제로 세균이 자리 잡는 것을 확인했다고 국제학술지에 보고했다. 다만 종양이 눈에 띄게 줄어든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20여 년간 이 분야가 풀어야 했던 숙제가 그 결과에 담겨 있다.
전남대 의대 민정준·홍영진 교수 공동연구팀과 바이오기업 씨앤큐어가 지난 5월 국제학술지 '테라노스틱스'에 발표한 항암 균주 'CNC018'은 그 숙제를 정면으로 겨눈다. 연구팀은 살모넬라의 병원성을 결정하는 유전자 73개를 되돌릴 수 없게 잘라냈다. 세균이 세포에 침입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게 하는 병원성 섬(SPI-1·SPI-2) 유전자 71개와, 스트레스 대응 물질을 만드는 유전자 2개다. 병을 일으키는 무기는 뽑아내고 종양을 찾아가 면역을 깨우는 능력만 남긴 '길들인 세균'이다.
연구팀이 짚은 작동 원리는 이렇다. 이 균주가 들어가면 암을 공격하는 T세포가 활성화되지만 동시에 지쳐 버리는데, 면역관문억제제를 함께 쓰면 그 지친 T세포가 다시 살아난다. 동물실험에서 항CTLA-4 계열 약과 함께 투여한 다섯 마리 중 네 마리에서 종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CNC018은 아직 사람에게 쓰인 적이 없다. 민정준 교수는 발표 당시 "현재 비임상 독성시험을 진행하고 있으며 내년 글로벌 임상시험을 통해 새로운 암 치료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전남대는 2013년 박종오 교수팀이 고형암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박테리아 기반 나노로봇을 국제학술지에 처음 선보인 이래 10여 년간 이 분야를 파 온 곳이다.
환자에게서 키운 '장기 조각'을 되돌려 넣다
살아있는 치료제의 또 다른 축은 오가노이드다. 줄기세포를 배양해 실제 장기의 구조와 기능을 축소해 재현한 '미니 장기'를 말한다. 환자 자신의 세포로 만들 수 있어, 손상된 조직을 갈아 끼우듯 재생하는 치료제로 주목받는다.
오가노이드사이언스는 환자 본인의 성체줄기세포에서 키운 장(腸) 오가노이드 치료제 'ATORM-C'로 지난 3월 16일 식품의약품안전처의 1상 임상시험계획을 승인받았다. 대장 궤양을 동반한 크론병 환자 9~18명을 서울아산병원에서 24주간 추적하는 설계다. 회사와 업계는 이를 오가노이드 재생치료제가 정식 임상에 들어간 세계 첫 사례로 본다. 다만 이 '세계 첫'은 회사 측 설명으로, 규제당국이 확인한 표현은 아니다.
후속 계획도 나와 있다. 회사는 방사선 치료 뒤 생기는 구강건조증을 겨냥한 침샘 오가노이드 치료제(ATORM-S)의 임상을 올해 시작한다는 구상이고, ATORM-C에 대해서는 2028년 다국적 2상을 목표로 제시했다. 일본 과학도쿄대 연구팀과의 장 오가노이드 공동연구도 지난 7월 발표됐다.
제도가 길을 터 준 사례도 있다. 지난해 5월에는 고려대 구로병원이 주도한 임상연구에서 베체트 장염 환자 다섯 명 중 네 명이 오가노이드 투여를 마쳤고, 세 명에게서 궤양이 아물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첨단재생바이오법에 따른 임상연구로, 정식 품목허가를 향한 임상시험과는 다른 경로다.
세계 지도 위에서 한국의 좌표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쯤 서 있을까. 올해 8월 국제학술지에 실린 계량서지 분석은 2000년부터 올해까지 나온 조작 세균 치료제 논문 약 4,000편을 훑었다. 결론은 중국과 미국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고, 한국은 인도·싱가포르와 함께 중국 외 아시아의 주요 기여국이지만 누적 산출량은 두 나라에 크게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개별 성과에서 앞선 사례가 있다는 것과, 분야 전체의 두께가 두껍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앞서간 사례가 무너진 전례도 살펴야 한다. 미국 신로직은 프로바이오틱 대장균을 개량해 종양 안에서만 면역 신호 물질을 내뿜도록 설계한 후보(SYNB1891)로 1상에서 안전성과 면역 반응을 확인했다고 2023년 발표했다. 그러나 회사는 2024년 2월 다른 후보물질의 3상 실패 뒤 인력을 90% 넘게 줄였고, 올해 7월에는 다른 기업과의 역합병 계약을 발표했다. 기존 주주 지분은 합병법인의 2.3% 수준이다. 유망한 데이터 하나가 회사를 살려 주지는 않는다.
규제 지형도 갈린다. 유럽연합은 첨단치료의약품을 2007년 제정된 규정으로 묶어 유럽의약품청 산하 위원회가 중앙에서 심사하고, 임상시험용 첨단치료의약품에 대한 새 가이드라인은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됐다.
살아 있기에 어렵다
가장 큰 숙제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다. 합성 분자는 성분과 용량이 정해져 있지만 생명체는 몸 안에서 변한다. 사람마다 미생물이 얼마나 자리 잡을지 예측하기 어렵고, 세균의 유전자가 시간이 지나며 불안정해질 수 있으며, 심어 넣은 유전자가 다른 미생물로 옮겨가거나(수평적 유전자 전달) 환경에 남아 도는 위험도 거론된다. 올해 나온 한 학술 리뷰는 통제되지 않는 증식, 수평적 유전자 전달, 의도치 않은 환경 잔류를 생물안전성 우려로 꼽으면서, 유전적 안정성과 제조 일관성, 예측 가능한 체내 성능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과제라고 정리했다.
규제의 빈칸은 더 구체적이다. FDA가 생균 치료제의 제조·품질 관리를 위해 마련한 가이던스는 그 적용 범위에서 유전자치료 벡터와 항암 세균, 항암 바이러스를 명시적으로 제외한다. 다시 말해 CNC018이나 SYNB1891 같은 유전자조작 항암 균주는 이 문서가 다루는 대상이 아니며, 재조합 생균 치료제는 임상시험 신청 전 규제당국과 따로 협의하라고만 적혀 있다. 정형화된 심사 기준이 아직 없다는 뜻이다.
한국은 제도를 먼저 손봤다. 첨단재생바이오법은 2024년 2월 개정돼 지난해 2월 시행됐다. 임상연구 대상자 제한을 없애고, 재생의료기관이 심의위원회 승인을 받아 시행하는 첨단재생의료 '치료' 제도를 새로 만든 것이 핵심이다. 오가노이드 치료제가 임상연구와 정식 임상 두 갈래로 동시에 굴러갈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제도가 앞서간 만큼 참고할 선례가 없다는 점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은 2021년 마이크로바이옴 사업 예비타당성조사 보고서에서, 관련 의약품 허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던 상황이 제도 마련 단계로 넘어왔고 한국이 해외에 견줘 앞선 편이지만, 참고할 해외 정책·제도 자료가 부족해 제도 수립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FDA가 재조합 생균 치료제에 대해 '임상 신청 전 규제당국과 먼저 협의하라'고만 적어 둔 것도 같은 사정을 가리킨다. 심사 기준을 먼저 만들어 놓고 신청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례를 하나씩 놓고 함께 만들어 가는 단계라는 뜻이다.
약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실험실에서 합성하는 것에서, 몸 안에서 살아 일하는 것으로. 그 변화의 앞자리에 한국의 이름이 여럿 올라 있다. 다만 임상 승인은 출발선이지 결승선이 아니다. 살아 있기에 강력한 이 약들이 살아 있기에 통제하기 어렵다는 숙제를 넘어 사람에게 안전하고 유효함을 증명하는 것 — 앞으로 몇 년, 한국이 진짜로 시험받을 지점은 여기다.
자료: 미국 식품의약국(FDA), 유럽의약품청(EMA), 전남대학교, 씨앤큐어, 오가노이드사이언스, 식품의약품안전처, 보건복지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