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바위가 먼저였나, 문장이 먼저였나 — 생명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유일혁 기자 · 입력 2026.07.23 18:10 · 수정 2026.09.07 10:55
생명은 자신을 복사하는 능력부터 얻었을까, 에너지를 만드는 발전소부터 지었을까 — 심해 열수구와 얼음 속 RNA, 그리고 42억 년 전 조상 LUCA를 통해 본 생명의 시작
[기획] 바위가 먼저였나, 문장이 먼저였나 — 생명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심해 열수구 주변에 서식하는 새우·게·홍합 등 생물군집. 생명 기원의 '대사 우선' 가설이 주목하는 환경이다. (사진 출처=NOAA)

당신을 이루는 원자는 돌과 바닷물의 원자와 다르지 않다. 어느 쪽도 저절로 숨 쉬거나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살아 있지 않은 물질이 자신을 복제하고 먹이에서 에너지를 얻으며 변하기 시작했다. 화학이 생명이 된 것이다.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어디서부터 생명일까. 이것이 ‘생명의 기원’이라는 오랜 수수께끼다.

2026년 이 수수께끼의 한 조각이 실험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MRC 분자생물학연구소 연구진은 QT45라는 작은 RNA를 찾아냈다. RNA는 유전정보를 적어두면서 화학반응까지 거들 수 있는, 만능에 가까운 분자다. QT45는 단 45개의 글자로 이뤄졌지만 자기와 짝을 이루는 설계도와 자기 자신의 복사본을 모두 만들었다.

이게 대단한 까닭은 생명이 처음부터 복잡한 복사기 없이도 자신을 베끼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복사의 정확도는 글자 하나당 94.1%였다. 그러나 아직 생명 탄생의 재현은 아니다. 알칼리성 얼음 속에서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해야 했고, 72일 동안 만들어진 양은 각각 약 0.2%에 그쳤다. 연구를 이끈 에도아르도 지아니는 작은 RNA의 발견으로 “자기복제 RNA가 저절로 등장했다는 생각의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고 밝혔다.

생명은 복사기보다 발전소를 먼저 지었을까

한쪽 과학자들은 출발점이 RNA가 아니라 대사였다고 본다. 대사는 먹이에서 에너지를 뽑고 몸의 재료를 마련하는 살림이다. 이 시나리오의 무대는 햇빛 한 줄기 없는 깊은 바다다. 그곳의 알칼리 열수구, 즉 암석과 반응한 따뜻한 물이 해저에서 솟는 틈이 최초의 발전소였다는 주장이다.

2000년 12월 워싱턴대 데버라 켈리 연구팀은 대서양 해저에서 ‘잃어버린 도시’를 발견했다. 잠수정 앨빈의 불빛 앞에 최고 60m 높이의 흰 석회 탑이 나타났다. 물은 섭씨 40~90도보다 낮거나 그 범위였고, 산성의 반대인 강한 알칼리성을 띠었다. 이 열수구는 12만 년 넘게 수소가 풍부한 물을 뿜어왔다.

핵심은 바닷물과 땅속 암석의 반응이다. 이 과정은 수소를 내놓고 열도 만든다. 수소가 풍부한 알칼리성 물과 이산화탄소가 많은 약산성 바닷물 사이에는 산도의 차이가 생긴다. 댐 양쪽의 물높이가 다르면 물이 흐르듯, 이 차이는 전자를 움직일 힘이 된다. 얇은 철·황 광물벽까지 놓이면 열수구는 천연 전지처럼 작동한다.

2020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닉 레인 등이 참여한 실험에서는 산도 차이와 수소, 광물 침전물이 함께 있을 때 이산화탄소가 포름산염으로 바뀌었다. 셋 가운데 하나만 빼도 생성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실험에서는 사문석화 광물, 즉 바닷물과 깊은 암석의 반응으로 생긴 광물을 이용해 포름산염·아세트산·피루브산·메탄올을 만들었다. 살아 있는 세포가 탄소를 몸의 재료로 바꾸는 반응과 닮은 결과였다.

이 그림의 매력은 생명이 처음부터 발전소를 발명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세포도 막 양쪽의 산도 차이를 이용해 ATP를 만든다. ATP는 세포가 일을 할 때 꺼내 쓰는 작은 에너지 화폐다. 열수구는 그 힘을 공짜로 제공했고, 바위 속 광물은 반응을 빠르게 돕는 촉매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촉매의 생물판이 효소다. 생명은 도구를 처음부터 만든 것이 아니라 바위의 도구를 물려받았을 수 있다.

하지만 바다는 너무 넓다. 만들어진 물질이 흩어지면 긴 분자로 이어 붙기 어렵다. 실험에서 얻은 양도 작았고, 일부 결과는 높은 압력이나 섭씨 100도에 기대었다. 열수구 이론의 핵심인 단일 광물벽을 가로지르는 이산화탄소 환원도 안정적으로 재현되지 않았다. 자연의 산도 차이가 실제로 생명의 기원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정면 반론도 있다.

글자를 베끼는 분자가 먼저였다는 주장

맞은편에는 ‘RNA 세계’가 있다. 논리는 간결하다. 생명이 이어지려면 정보를 저장해야 하고, 그 정보를 복사해야 한다. RNA는 두 일을 함께 할 후보였다. 리보자임은 효소처럼 반응을 돕는 RNA다. 단백질이 없어도 RNA가 화학반응을 지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1982년 콜로라도대의 토머스 체크는 RNA가 스스로 일부를 잘라내는 현상을 발견했다. 예일대의 시드니 올트먼은 또 다른 RNA가 반응을 돕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두 사람은 RNA의 촉매 기능을 발견한 공로로 1989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오늘날 세포가 단백질을 만드는 리보솜에서도 반응의 중심을 RNA가 맡는다. 과거 RNA 세계가 남긴 ‘분자 화석’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복사할 RNA가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RNA를 이루는 글자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초기 지구에서 어떻게 조립했는지가 큰 벽이었다. 존 서덜랜드가 이끈 연구진은 2009년 지구 초기에 있을 법한 화학 조건에서 RNA 글자의 한 종류를 만드는 길을 제시했다. 2015년에는 시안화수소와 황화수소, 자외선, 단순한 광물에서 RNA 재료뿐 아니라 단백질과 막의 재료까지 함께 나올 수 있음을 보였다.

복제가 시작된 뒤에도 문제가 남는다. 복사본과 원본은 지퍼처럼 서로 달라붙는다. 순수한 RNA 두 가닥은 너무 끈끈해 효소 없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솔크연구소의 제럴드 조이스 연구팀이 만든 RNA는 약 1시간마다 늘어나며 진화했지만, 연구자가 정해진 재료를 계속 넣어줘야 했다. QT45도 복사의 두 단계를 해냈을 뿐, 스스로 먹고 복제하고 진화를 이어가는 열린 생명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바다와 연못 사이에서 두 진영의 경계가 흐려졌다

최근 연구는 ‘대사가 먼저냐, 정보가 먼저냐’라는 선택 자체가 지나치게 단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덜랜드의 실험에서는 RNA와 단백질, 세포막의 재료가 하나의 화학에서 함께 나왔다. 정보와 발전소와 그릇이 차례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같은 작업대에서 동시에 조립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다.

무대를 둘러싼 논쟁도 이어진다. 육상파는 화산 지형의 온천과 웅덩이를 주목한다. 물이 마르면 흩어졌던 재료가 얇은 막에 모이고, 다시 젖으면 다음 반응이 시작된다. 반죽을 졸여 맛을 진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2022년 실험에서는 섭씨 80도에서 세 차례 말리고 적시는 과정만으로 길이 800나노미터 이상인 RNA 비슷한 사슬이 관찰됐다. 20도에서는 거의 생기지 않았다.

육상파는 심해에는 이런 건조와 재수화가 없다고 지적한다. 심해파는 육지 웅덩이에 안정적인 에너지와 물 공급이 없다고 맞선다. 물이 있어 생명이 살 수 있는 조건과, 생명이 처음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은 같지 않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대 샌타크루즈의 브루스 데이머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경관 전체가 생명의 시작에 관여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42억 년 전 조상은 이미 너무 복잡했다

현재 생물의 유전정보를 거꾸로 추적하면 LUCA에 닿는다. LUCA는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이 갈라지기 전 마지막 공통 조상이다. 브리스톨대·엑서터대·네덜란드왕립해양연구소 연구진은 약 700종과 1만 개 가까운 유전자 집단을 분석해 LUCA가 약 42억 년 전에 살았다고 2024년 발표했다. 지구가 형성된 45억4000만 년 전에서 불과 수억 년 뒤다.

재구성된 LUCA는 초라한 화학 방울이 아니었다. 약 2600개의 단백질을 만들 수 있었고, 산소 없이 수소와 이산화탄소를 이용하는 복잡한 미생물이었다. 바이러스에 맞서는 초기 방어 장치도 갖췄다. 열수구의 ‘대사 우선’ 그림과 닮았지만, 이것이 열수구의 승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MIT의 그레그 푸르니에는 LUCA가 최초의 세포도 최초의 미생물도 아니며, 오히려 생명 기원 이야기의 “끝”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LUCA는 이미 긴 진화를 거친 생명이기 때문이다. 42억 년이라는 연대가 너무 이르다는 반론도 남아 있다.

과학자들은 이제 과거의 분자를 직접 되살린다. 위스콘신매디슨대 베튈 카차르 연구진은 오늘날 생물의 유전정보로 약 20억 년 전 질소고정효소의 모습을 추정해 합성했다. 질소고정효소는 생물이 질소를 쓸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도구다. 연구진은 이 고대 효소를 살아 있는 세균의 유전체에 넣었고, 효소는 실제 세포 안에서 작동했다. ‘쥬라기 공원’의 분자판인 셈이다. 초기 생명이 무조건 단순했으리라는 생각도 흔들리고 있다.

조각들은 빠르게 모인다. 생명의 재료가 자연스러운 조건에서 만들어졌고, 원시적인 막은 자라고 갈라졌다. RNA는 작게나마 자신을 복사했다. 광물은 효소 없이 이산화탄소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 조각들이 어떻게 한곳에서 만나 스스로 먹고 복제하며 끝없이 진화하는 생명이 됐는지는 아직 모른다. 바다였는지 뭍이었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생명과 무생물 사이에는 선명한 문 하나가 없을지도 모른다. 돌의 화학이 조금씩 기억을 얻고, 에너지를 쓰고, 경계를 만들며 생명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그 흐름을 재현하는 날 우리는 두 질문에 동시에 가까워진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 왔는가. 그리고 물과 바위가 있는 다른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시작될 수 있는가.

한국 탐사선도 열수구 앞에 갔다 — 인도양의 온누리·온바다·온나래

생명의 기원 논쟁의 무대인 심해 열수구는 한국 연구선의 탐사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김동성 연구진은 2018년 인도양 중앙해령에서 국내 최초로 열수분출공을 찾아 '온누리'라는 이름을 붙였고, 2021년 11월에는 해양수산부 지원 아래 대양탐사선 이사부호와 무인잠수정 로포스(ROPOS)를 투입해 수심 2,500~3,000m에서 '온바다'와 '온나래' 두 곳을 추가로 발견했다. 온바다에는 광물 굴뚝 7개, 온나래에는 9개가 솟아 있었고 주변 물 온도는 약 303도에 달했다.

KIOST는 끓는 물과 어둠 속에서 사는 이곳 생물들의 적응 방식이 지구 생명 탄생의 비밀을 푸는 단서이자 쓸모 있는 유전자원이 될 것으로 본다. 한국은 2012년 국제해저기구(ISA)로부터 인도양 중앙해령에서 서울 면적의 16배가 넘는 1만㎢의 해저열수광상 탐사권도 확보해, 과학과 자원 탐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스스로 꼽은 관문, '복제의 고리 닫기'

QT45를 만든 MRC 분자생물학연구소는 남은 과제도 함께 공개했다. 지금은 설계도 가닥을 만드는 반응과 자기 자신을 복사하는 반응이 따로 일어나므로, 두 반응을 한 용기 안에서 이어 붙여 복제의 순환 고리를 닫는 것이 다음 목표다. 여기에 수율을 끌어올려 만들어지는 양이 스스로를 유지할 수준에 이르면, 성장하고 진화하는 화학 시스템이라는 문턱에 다가선다.

질문은 우주로도 넓어지고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이 미 항공우주국(NASA)과 공동 개발해 2025년 3월 발사한 우주망원경 스피어엑스의 공식 임무에는 생명의 재료인 물 얼음과 유기물이 은하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를 훑는 관측이 들어 있다. 생명이 어떻게 시작됐는가라는 물음이 실험실의 얼음과 심해의 굴뚝을 넘어, 하늘 전체를 재는 공식 관측 목표가 된 것이다.

자료: MRC 분자생물학연구소·브리스톨대·엑서터대·네덜란드왕립해양연구소·위스콘신매디슨대·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솔크연구소·Nature·Nature Chemistry·Nature Ecology & Evolution·Science·PLoS Biology·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해양수산부·국제해저기구(ISA)·한국천문연구원·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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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혁 기자 ih.yoo@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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