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고양이 493마리 종양 유전체 지도, 유방암 절반 이상에서 사람과 다른 '진범' 유전자 찾아내다

집에서 함께 사는 고양이가 유방에 혹이 생겨 유선암 진단을 받았다면, 그 혹을 만든 고장 난 유전자는 사람의 유방암을 일으키는 유전자와 다를 가능성이 크다. 영국 웰컴 생어 연구소가 캐나다 궬프대학교, 스위스 베른대학교와 함께 5개국에서 모은 반려묘 493마리의 종양을 통째로 분석한 결과, 고양이 유방암(유선암) 환자의 절반이 넘는 사례에서 FBXW7이라는 유전자가 고장 나 있었다. 더구나 이 유전자가 고장 난 종양은 이미 쓰이고 있는 항암제에 실험실에서 더 강하게 반응한다는 단서까지 함께 확인됐다.
왜 지금, 고양이 암 유전자인가
이번 연구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2026년 2월 19일 '고양이의 종양유전체(The oncogenome of the domestic cat)'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그동안 고양이 암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유전자 분석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연구팀에 따르면 이번 연구 이전까지 고양이 암 유전자를 다룬 연구는 전 세계에 단 3건뿐이었고, 그마저도 표본 수가 적고 한 가지 암 종류만 들여다본 한계가 있었다. 동물병원 한 곳이 평생 마주칠까 말까 한 드문 사례들을 모아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규모로 비교하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새로운 실험동물을 늘리는 대신 '이미 있는 자료를 다시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풀었다. 5개국의 동물병원에서 수의학적 진단을 위해 이미 떼어내고 남아 있던 종양·정상조직 조각들을 모아, 13가지 종양 유형에 걸쳐 493마리분의 조직 쌍을 확보했다. 버려질 뻔한 조직 조각들이 대규모 국제 공동연구의 재료가 된 셈이다.
493마리가 보여준 것 — 같은 암, 다른 범인
연구팀은 사람의 암과 관련된 유전자 약 1,000개의 고양이판(상동유전자)을 기준으로 493마리의 종양을 분석했다. 그 결과 전체 종양을 통틀어 가장 흔하게 고장 나 있던 유전자는 TP53이었다. TP53은 세포가 손상됐을 때 스스로 증식을 멈추거나 죽게 만드는 '감시자' 역할을 하는 유전자로, 사람 암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암 억제유전자 중 하나다. 이 밖에 PTEN이나 FAS라는 유전자가 사라지거나 MYC라는 유전자가 지나치게 많이 복제되는 이상도 흔하게 나타났다. TP53·CTNNB1·PTEN·TRAF3·FBXW7 다섯 개 유전자는 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여러 종양에서 공통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유방암(유선암)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람 유방암에서는 TP53의 이상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양이 유방암에서는 FBXW7이라는 유전자의 변이가 절반을 넘는 사례에서 발견돼 가장 흔한 원인으로 꼽혔다. FBXW7은 세포 안에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단백질에 '폐기 처분' 표시를 붙여 분해되도록 지시하는 유전자다. 이 기능이 고장 나면 세포 증식을 촉진하는 단백질들이 제때 없어지지 않고 쌓여 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방암 종양에서는 FBXW7 외에 PIK3CA라는 유전자의 변이도 47%에서 확인되는 등 모두 7개의 원인 유전자가 발견됐다. 사람과 고양이가 이름은 같은 유방암에 걸리지만, 그 뒤에 숨은 '주범 유전자'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배양접시 속 리허설 — 오래된 약의 새로운 쓰임새
연구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FBXW7이 고장 난 고양이 유방종양 조직을 이용해 배양접시 속에서 종양을 축소판으로 복제한 '오가노이드'를 만들었다. 오가노이드는 환자의 실제 조직 일부를 떼어내 실험실에서 작은 덩어리 형태로 길러낸 것으로, 약물을 환자에게 직접 쓰기 전에 미리 반응을 시험해 보는 일종의 '리허설' 도구다. 이 오가노이드에 빈크리스틴 등 빈카 알칼로이드 계열 항암제를 처리한 결과, FBXW7이 고장 난 종양은 정상인 종양보다 성장 억제 효과가 유의하게 더 크게 나타났다. 빈크리스틴은 이미 사람과 동물 병원에서 쓰이고 있는 기존 약물이어서, 이번 결과는 새로운 약을 개발했다기보다 '이미 있던 약의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낸' 단서에 가깝다.
다만 이 결과를 실제 치료법으로 받아들이기는 이르다. 실험은 살아있는 고양이가 아니라 배양접시 속 조직 단계에서 이뤄졌고, 임상시험 단계에도 이르지 않았다. 연구팀 스스로도 조직 샘플에서만 관찰된 결과이며 살아있는 고양이나 사람에서도 같은 효과가 나타날지는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고 밝히며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남은 질문들
연구팀은 이번 분석을 통해 모두 31개의 암 원인 유전자와 함께 돌연변이 패턴, 종양과 관련된 바이러스 서열, 암을 유발할 수 있는 타고난(생식세포계열) 변이까지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고양이의 종양유전체가 사람과 핵심적으로 닮아 있어, 사람 암 연구에 참고할 수 있는 비교종양학(사람과 동물의 암을 나란히 비교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단서를 찾는 연구 분야) 모델로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외부 종양학 전문가는 이 연구를 두고 '기술적으로 매우 견고하다'면서도 한계를 짚었다. 분석이 처음부터 사람 암 관련 유전자 약 1,000개만을 기준으로 설계됐기 때문에, 고양이에게만 있는 고유한 변이는 애초에 포착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전문가는 고양이 유전변이 목록 자체가 아직 초기 단계여서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고도 덧붙였다. 또 연구에서 발견된 종양 관련 바이러스 서열에 대해서도 '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곧 암의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같은 바이러스가 건강한 고양이에서도 발견되며, 자외선 노출 같은 다른 요인이 함께 필요하다'며 성급한 인과관계 해석을 경계했다.
결국 이번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두 가지다. 고양이와 사람은 같은 이름의 암에 걸리더라도 그 뒤에 숨은 유전자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병원에서 버려질 뻔했던 조직 조각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암의 얼굴을 새롭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자료: 웰컴 생어 연구소, 궬프대학교, 베른대학교, 오스트리아 빈 수의과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