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7000개 AI가 신약개발 분업…‘가상 바이오기업’의 가능성과 한계

사람이 없는 제약회사에서 3만7000여 개의 인공지능(AI)이 연구 책임자와 분야별 전문가, 검토자로 나뉘어 신약개발을 수행하는 실험이 현실이 됐다. AI가 단순히 논문을 요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임상시험 자료를 정리해 유망한 약물 표적을 찾고 치료 전략까지 제안하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생의학데이터과학과 제임스 주 교수 연구팀은 다중 에이전트 AI 체계인 ‘가상 바이오기업(Virtual Biotech)’을 개발했다. 연구 결과는 2026년 9월 17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온라인 게재됐다. 논문 제목은 ‘The Virtual Biotech: A multi-agent AI framework for therapeutic discovery and development’이며 DOI는 10.1126/science.aeg6779이다.
이 시스템은 실제 바이오기업의 연구조직을 본떴다. 전체 연구 방향을 조율하는 가상 최고과학책임자(CSO) 아래에 각 분야를 맡은 전문 에이전트가 배치되고, 별도의 과학 리뷰어가 사용한 방법과 도출한 주장을 다시 점검한다. 여러 AI가 같은 답을 반복하는 구조가 아니라, 역할을 나누고 서로의 결과를 검토하도록 설계한 셈이다.
연구진은 3만7000여 에이전트를 투입해 임상시험 5만5984건을 정리한 뒤 약물 표적이 특정 세포 유형에서 얼마나 선택적으로 나타나는지와 실제 임상 성과의 관계를 후향적으로 분석했다. 후향적 분석은 이미 축적된 과거 자료를 거꾸로 살펴 규칙을 찾는 방식이다. 스탠퍼드대 발표에 따르면 이 정도 규모의 자료를 분석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 미만이었다.
분석에서는 스위치를 켜고 끄듯 특정 세포에서 뚜렷하게 발현되는 표적을 겨냥한 약물이 비교군보다 임상 1상에서 2상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40% 높았다. 시장에 도달할 가능성은 48% 높았고, 이상반응은 32% 적었다. 표적이 필요한 세포에 더 선택적으로 나타날수록 치료 효과와 안전성을 함께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계를 방대한 임상자료에서 찾아낸 것이다.
가상 바이오기업은 폐암의 종양미세환경에서 B7-H3가 맡는 역할도 분석했다. 종양미세환경은 암세포 주변의 면역세포와 혈관, 여러 신호가 얽힌 생태계를 뜻한다. AI는 B7-H3를 겨냥한 항체약물접합체(ADC)를 치료 전략으로 제안했다. ADC는 암세포를 알아보는 항체에 약물을 연결해 목표 지점으로 운반하는 방식이다.
이 방향은 다이이찌산쿄가 발굴하고 머크와 공동 개발 중인 시험약 이피나타맙 데룩스테칸과 맞닿아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은 2025년 8월 18일 백금계 항암치료 뒤 진행한 확장기 소세포폐암을 대상으로 이 시험약을 혁신치료제로 지정했다. 근거에는 187명이 참여한 2상 IDeate-Lung01과 1·2상 IDeate-PanTumor01 자료가 활용됐다. 다만 혁신치료제 지정은 개발과 심사를 빠르게 진행하도록 돕는 제도이지 품목허가를 뜻하지 않는다. 당시 승인된 B7-H3 표적 치료제도 없었다.
시스템은 중단된 궤양성대장염 vixarelimab 시험의 제한적인 효능을 신호전달 경로가 서로 겹쳤을 가능성과 연결해 분석하고, 더 넓은 gp130 축 바이오마커를 검토했다. 바이오마커는 치료 반응이나 질병 상태를 판단하는 생물학적 지표다. 이는 실패하거나 기대에 못 미친 임상시험에서도 다음 연구 방향을 찾는 데 AI 조직을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연구는 2025년 공개된 스탠퍼드대 ‘Virtual Lab’을 확장한 결과다. 선행 연구에서는 AI 연구책임자와 전문 에이전트들이 ESM, AlphaFold-Multimer, Rosetta를 결합해 코로나19 바이러스 나노바디 92개를 설계했다. 실제 실험에서는 기능성 결합체와 JN.1·KP.3 변이에 개선된 결합을 보인 후보 2개가 확인됐다. 새 체계는 이러한 연구실형 협업을 표적 선정과 약물 형태 결정, 임상시험 해석까지 넓혔다.
가상 바이오기업이 내놓은 결과를 곧바로 치료 효과의 증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연구진도 시스템의 산출물을 초기 연구용 가설로 규정하고 추가 실험과 검증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이번 성과의 의미는 AI가 제약회사를 완전히 대신했다는 데 있기보다, 사람이 검증할 후보와 질문을 방대한 자료 속에서 조직적으로 좁혀주는 새로운 연구 방식에 있다.
자료: 스탠퍼드대학교 의과대학, 미국과학진흥협회(AAAS)·Science, Nature, 머크, 다이이찌산쿄, 미국 식품의약국(F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