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법인격 논의의 핵심은 ‘사람처럼’이 아니라 피해와 책임이다

유일혁 기자 · 입력 2026.10.22 05:42
자율로봇의 권리보다 책임 귀속과 피해구제에서 출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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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의회 건물 외부 모습. 해당 연구·행사의 현장 사진은 아닙니다.

European Parliament from EU

사람처럼 말하고 스스로 도구를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AI와 로봇을 법적으로도 하나의 주체로 볼 수 있는지가 더는 먼 미래만의 질문이 아니게 됐다. 다만 법인격 논의의 출발점은 AI가 얼마나 영리하거나 사람과 비슷한지가 아니라, 그 제도가 사람의 권리와 안전을 지키는 데 실제로 필요한가에 있어야 한다.

법인격은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는 법적 지위를 뜻한다. 자연인인 사람뿐 아니라 회사 같은 법인도 재산을 소유하고 계약을 맺으며 책임을 질 수 있다. 사람이 아닌 대상을 법적 주체로 다루는 것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적 장치다. 따라서 AI 법인격도 기술의 겉모습이나 지능 수준만 보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어떤 권리와 의무를 누구에게 부여하고 그 결과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따져야 한다.

유럽의회는 2017년 결의 2015/2103(INL)을 찬성 451표, 반대 138표, 기권 20표로 채택했다. 이 결의는 로봇에게 곧바로 인격을 부여한 법률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가장 정교한 자율로봇이 손해를 냈을 때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전자적 인격’이라는 지위를 검토하라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요청한 비구속적 권고였다.

당시 문제의식도 AI의 존엄성이나 뛰어난 지능을 인정하자는 데 있지 않았다. 학습하고 적응하는 자율로봇이 사고를 일으켰을 때 제조자, 운영자, 소유자, 사용자 가운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기존 법만으로 가리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중심이었다. 결의는 의무보험과 보상기금, 첨단 로봇 등록제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다른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

결의는 당시 법체계에서 로봇이 자기 행위에 스스로 책임질 수 없으며, 손해의 원인을 특정한 인간 행위자에게 돌릴 수 있다면 기존 책임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의회가 의뢰한 연구에서는 전자적 인격 구상이 부적절하고 실익도 낮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후 제도화의 중심은 AI를 새로운 인격자로 만드는 방향보다 인간과 기업에 위험관리, 감독, 투명성, 피해구제 의무를 배분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현행 유럽연합 AI법도 AI 자체를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삼지 않는다. 대신 공급자, 배포자, 수입자, 유통자 등을 자연인이나 법인 등으로 정의하고 각각의 의무를 나눈다. AI가 한 일을 AI에게 책임지게 하기보다, AI를 만들고 시장에 내놓고 사용하는 사람과 조직의 역할에 따라 책임 구조를 세운 것이다.

한국에서도 박영선 의원 등 38인이 2017년 7월 19일 의안번호 2008068호로 로봇기본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 역시 로봇을 즉시 법인격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국가가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전자적 인격체의 지위와 로봇 손해의 책임·보상 방안에 관한 정책을 마련하도록 제안했다. 로봇은 외부환경을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해 자율적으로 동작하는 기계장치 또는 소프트웨어로 정의했으며, 국가로봇윤리·정책위원회와 국가로봇정책연구원 설치도 담았다.

동물의 법적 지위도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독일 민법 제90a조는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지만, 동물을 사람이나 회사와 같은 완전한 법인격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별도 법률에 따른 보호를 인정하면서 특별한 규정이 없으면 물건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보호받는 법적 지위와 권리·의무의 완전한 주체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AI 법인격이 의미를 가지려면 책임을 피하는 방패가 아니라 책임의 귀속점을 분명히 하고 의무를 부과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사람과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지위를 부여하기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며 피해가 생겼을 때 실질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법이 AI에 요구할 기준 역시 기술의 인간 흉내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책임 있는 판단과 행동에 놓여야 한다.

자료: 유럽의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대한민국 국회,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국민참여입법센터, 한국법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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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혁 기자 ih.yoo@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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