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불량품을 기다리지 않고 불량 사진부터 만든다…지멘스 공장의 ‘가상 검사 예습’

새 전자제품의 기판을 한 장도 납땜하지 않았는데, 검사기는 이미 불량품을 보고 공부한다. 빠져 있는 부품, 제자리에서 밀려난 부품, 한쪽이 들려 묘비처럼 선 부품을 컴퓨터가 먼저 만들어 보여주는 방식이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지멘스 일렉트로닉스 팩토리 에를랑겐에서는 이런 ‘가상 예습’으로 첫 실물 기판이 생산라인에 도착하기 전에 자동광학검사 준비를 시작하는 공동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눈길을 끄는 숫자는 ‘공수 최대 85% 감소’다. 그러나 이는 공장 인력이나 전체 생산시간을 85% 줄였다는 뜻이 아니다. 신제품 또는 설계가 바뀐 PCBA의 자동광학검사 프로그램을 만들 때 투입되는 수작업 엔지니어링 공수를 최대 85% 줄이겠다는 프로젝트 목표다. 설명을 위해 기존 작업에 100시간이 든다고 가정하면 최대 15시간까지 줄인다는 종류의 주장이다. 실제로 100시간이 15시간이 된 측정 사례가 공개된 것은 아니다.
실물 ‘정답 기판’이 오기 전에 만드는 가상 모의고사
PCB는 부품을 올리기 전의 인쇄회로기판이고, PCBA는 그 위에 부품을 배치하고 납땜해 조립을 마친 기판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검사하는 대상은 엄밀히 말해 PCBA다. 기존 방식에서는 첫 실물 기판을 확보한 뒤 정상 조립 상태의 기준판과 카메라 조건을 맞추며 비전 시스템을 훈련하고 검사장비를 설정했다. 실물이 나와야 검사 준비의 중요한 부분을 시작할 수 있었던 셈이다.
새 흐름은 그 출발점을 설계 단계로 옮긴다. 먼저 Teamcenter에서 PCB 설계와 부품명세서인 BOM, 부품 정보를 불러온다. Process Preparation X가 데이터를 검증하고 정규화해 조립 완료 상태의 PCBA 디지털 모델을 구성한다. 이어 정상적으로 조립된 모습을 나타내는 ‘가상 골든보드’를 만든다. 골든보드가 검사기의 답안지라면, 합성 불량 이미지는 일부러 오답을 섞어 만든 모의고사 문제에 해당한다.
NVIDIA Cosmos Data Factory는 이 가상 기판을 바탕으로 정상 이미지와 여러 불량 조건의 이미지를 생성한다. 공개된 합성 결함에는 부품 위치 이동, 툼스톤 현상, 옆으로 뒤집힌 부품, 극성 반전, 부품 누락, 관통형 핀 변화, 납땜 품질 이상이 포함된다. 툼스톤은 작은 부품의 한쪽 끝이 들려 기판 위에 세워진 상태를 말한다. 출력 자료에는 일반 색상 영상인 RGB 이미지뿐 아니라 불량 영역을 픽셀 단위로 구분한 세그멘테이션, 결함 위치를 네모로 표시한 경계상자, 메타데이터와 부품별 잘라낸 영상 등이 들어간다.
실제 생산에서는 AOI, 즉 카메라로 조립 상태를 살피는 자동광학검사가 결함 후보를 표시한다. 이후 AI 기반 2차 검사가 실제 불량과 오검출을 구분하도록 보조한다. 여기서 false call은 AOI가 불량 후보로 표시했지만 실제로는 불량이 아닌 오검출을 뜻한다. AI가 최종 합격과 불합격을 전부 자동 확정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85%와 세 가지 40%가 말하는 것
지멘스는 2026년 10월 19일 발표에서 수작업 엔지니어링 공수를 최대 85% 줄이고 신제품 PCBA의 시장 출시기간을 최대 40%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틀 뒤 공개한 AOI 전용 자료는 공수 최대 85% 감소, 오검출 약 40% 감소, 초도통과수율 5% 초과 향상을 모두 프로젝트 목표라고 명시했다. 초도통과수율은 재작업 없이 첫 생산과 검사를 통과한 비율이다. 5% 초과가 상대증가율인지 퍼센트포인트 상승인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40%라는 숫자는 서로 다른 곳에 세 번 등장해 구분이 필요하다. 첫째는 시장 출시기간을 최대 40% 단축할 수 있다는 지멘스의 주장이다. 둘째는 오검출을 약 40% 줄이겠다는 프로젝트 목표다. 같은 지멘스 자료에서도 본문은 40%, 요약문은 40% 초과라고 달리 적었다. 셋째는 엔비디아가 밝혔다고 한 검사 공정 보정시간 40% 감소다. 세 수치는 분모와 측정 대상이 다르므로 서로 대신하거나 합산할 수 없다. 기존 보정시간과 표본 수, 측정 조건도 공개되지 않았다.
‘최대’는 반에서 가장 높은 한 학생의 점수와 비슷하다. 최고점만 봐서는 학급 평균을 알 수 없다. 어떤 PCB에서 85%가 나왔는지, 몇 종을 시험했는지, 평균과 중앙값이 얼마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디지털 트윈 구축, CAD·BOM 정제, 재질과 조명 모델링, 합성 이미지 검수, GPU 처리, 첫 실물 생산 뒤 재교정까지 공수 계산에 포함했는지도 알 수 없다.
다품종 공장의 준비시간을 앞으로 당긴다는 의미
이 접근법의 기술적 의미는 검사 자체를 새로 발명한 데 있지 않다. 실제 불량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던 준비 작업의 일부를 설계 단계로 앞당겼다는 데 있다. 제품과 공정이 자주 바뀌는 공장에서는 신제품 전환 때마다 실물 기준판을 기다리는 시간이 부담이 된다. 지멘스는 에를랑겐 공장을 첫 내부 적용·검증 사업장인 ‘Customer Zero’로 설명했고, 생산중단 없이 주 3∼5회의 제품·공정 변경을 수용하는 것을 목표 운영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는 이미 공장 전체가 달성한 실적은 아니다.
PCB 머신비전과 합성 결함 데이터라는 발상 자체는 새롭지 않다. PCB 머신비전은 1980년대부터 연구됐고, 2019년에는 6종 결함을 담은 합성 PCB 영상 1,386장 규모의 공개 데이터셋도 발표됐다. 지멘스와 엔비디아 역시 2022년 에를랑겐 공장에서 합성 PCB 결함 영상을 이용한 사례를 발표하며 검사 AI 모델 설정시간을 5배 단축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당시에도 절대 작업시간과 반복시험 자료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 프로젝트의 차이는 설계와 BOM, 공정준비 시스템, 합성데이터 생성기를 실제 다품종 공장의 AOI 준비 흐름에 연결했다는 점이다. 공개 저장소에는 실행 가능한 합성데이터 생성 도구와 일부 샘플 PCB 자산이 있다. 그러나 에를랑겐 공장에서 사용한 PCB 자산과 학습 데이터, 실험 결과, 성능 평가 자료는 공개되지 않았다. CAD를 준비된 USD 조립체로 바꾸는 도구도 저장소에 포함되지 않아 공개 자료만으로 현장 결과를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가상 모의고사가 실제 도로시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합성검사는 운전 시뮬레이터와 닮았다. 비와 야간, 장애물 같은 조건을 미리 연습할 수 있지만 시뮬레이터에 없던 실제 도로 상황까지 안전하다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공장의 납땜 반사, 플럭스 잔류물, 먼지, 렌즈 오염, 카메라 위치, 부품 공급사와 생산 로트의 편차를 가상 영상이 모두 재현한다는 보장은 없다. 생성 규칙에 넣지 않은 새로운 납땜 이상이나 여러 문제가 겹친 복합 불량도 놓칠 수 있다.
가상 골든보드의 정확성도 중요하다. BOM이나 부품 방향, CAD 좌표, 허용공차가 잘못 입력되면 같은 오류가 합성 이미지 전체에 반복될 수 있다. 품질이 낮은 합성데이터를 추가했을 때 오히려 모델 정확도가 떨어진 별도 산업결함 연구도 있다. 합성 이미지의 수보다 현실성, 다양성, 라벨의 물리적 타당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엔비디아의 기술 안내 역시 실제 정답 영상으로 성능을 보완하고, 학습 때 보지 않은 실물 영상으로 시험하는 절차를 제시한다.
오검출 감소만으로 안전성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검사 기준을 느슨하게 하면 정상 제품을 불량으로 보는 오검출은 줄어도, 실제 불량을 정상으로 통과시키는 거짓 음성이 늘 수 있다. 발표 자료에는 결함 종류별 정밀도와 재현율, 거짓 음성률, 불량 유출률이 없다. 초도통과수율이 높아져도 공정 자체의 불량이 줄었는지, 재검사 판정만 달라졌는지 분리해 확인해야 한다.
공수 최대 85%를 실증 성과로 인정하려면 신규·설계변경·부품대체 보드를 나눠 기존 방식과 같은 조건에서 비교해야 한다. 디지털 트윈 준비부터 첫 실물 생산 후 재교정까지 모든 시간을 포함하고, 보드별 투입시간과 표본 수, 평균·중앙값·범위와 신뢰구간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학습에 쓰지 않은 실제 생산 로트와 새 설계를 대상으로 결함별 검출 성능과 불량 유출률을 함께 살펴야 한다. 카메라와 조명, 부품 공급사, 생산라인이 달라져도 결과가 반복되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현재 2026년 프로젝트를 검증한 동료심사 논문이나 독립기관 재현 결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PCBA 디지털 트윈으로 합성 불량 이미지를 만들고 실물 생산 전에 AOI를 준비하는 동일 흐름을 양산에서 검증한 공개 결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실물 검사가 사라졌다는 데 있지 않다. 실물이 나온 뒤 하던 준비의 일부를 더 이른 시점으로 옮겼다는 데 있다. 85%가 현장의 대표적인 성과가 되려면 서로 다른 PCBA와 실제 양산 불량을 이용한 독립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
자료: 지멘스 AG·지멘스 디지털 인더스트리 소프트웨어·엔비디아·한국생산기술연구원·산업통상자원부·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