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사체·상아·혈흔을 25개 DNA 단서로 잇다…‘종별 DB’ 없는 HARP의 가능성과 빈칸

김동현 기자 · 입력 2026.08.07 17:02 · 수정 2026.08.20 14:50
공개 하마 유전체로 만든 가상 밀렵 사건에서 무작위 일치확률 약 593만분의 1…현장 감식까지는 검증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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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Brett Billings/USFWS, Public Domain)

물가에서 하마 한 마리가 사체로 발견됐다. 차량에는 하마의 송곳니가 실려 있고, 칼과 옷에는 혈흔이 남아 있다. 네 흔적은 정말 한 마리에서 나온 것일까. DNA를 대조한 결과는 하나의 개체를 가리켰다. 다만 이것은 실제 압수·수사 사건이 아니다. 에든버러대학교 왕립(딕)수의대·로슬린연구소와 TRACE Wildlife Forensics Network 연구진이 공개된 하마 유전체에 사체·상아·칼·옷의 역할을 붙여 만든 가상 밀렵 시나리오다. 오히려 중요한 반전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 연구진은 서로 다른 두 연구의 공개 데이터를 분석하다가 네 데이터가 같은 하마에서 나왔음을 확인했고, 그 사실을 이용해 새로운 확률 계산법을 시험했다.

‘얼마나 드문 DNA인가’를 모를 때 생기는 병목

DNA가 같아 보인다는 말만으로는 증거의 무게를 정하기 어렵다. 그 프로필이 개체군에서 흔하다면 다른 개체도 우연히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감식에서는 각 DNA 변이가 해당 종과 개체군에서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대립유전자 빈도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했다. 논문은 대표 표본이 대체로 30개를 넘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필요량은 종과 집단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희귀종이나 자료가 거의 없는 종에서는 이 빈도표를 만드는 일 자체가 큰 병목이 된다.

HARP의 정식 명칭은 ‘heterozygote analysis for reference-free probability assessment’, 곧 ‘참조자료 없는 확률평가를 위한 이형접합 분석’이다. 핵심은 이형접합 SNP, 즉 부모에게서 받은 두 DNA 글자가 서로 다른 지점만 증거로 쓰는 데 있다.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이라는 집단유전학 조건에서 두 글자의 빈도를 p와 q라고 하면 이형접합 유전자형의 빈도 2pq는 p와 q가 각각 0.5일 때 최대 0.5다. 연구진은 개체군의 실제 빈도를 몰라도 각 일치 지점이 나타날 최대 빈도를 ‘반반 동전’처럼 0.5로 놓았다. 반대로 두 글자가 같은 동형접합 유전자형은 한 글자가 집단에 사실상 고정되면 빈도가 1에 가까워질 수 있어 증거력을 주지 않았다.

계산은 여기서 한 번 더 보수적으로 조정됐다. 연구진은 이형접합 과잉 가능성을 10% 할인하는 s=0.1을 두고, 서로 독립인 SNP n개가 일치할 때 무작위 일치확률을 P=0.5^[n×(1−s)]로 계산했다. 25개가 맞더라도 동전을 단순히 25번 던진 셈이 아니라 지수 22.5회에 해당한다. HARP가 생략하려는 것은 종·개체군별 빈도표와 미리 개발·검증한 종 특이적 표준 마커 패널이다. DNA 추출과 염기서열 분석까지 없애는 기술은 아니다.

310억 개 DNA 글자에서 남긴 25개의 단서

분석에 투입된 공개 유전체는 6개였지만 실제 하마는 3마리였다. 하마 A에서 만든 독립 라이브러리 네 개가 사체, 송곳니·상아, 칼의 혈흔, 옷의 혈흔 역할을 맡았다. 앞의 세 데이터는 같은 조직 BioSample에서 나왔고, 네 번째는 다른 연구에서 ‘hippo father’로 등록된 조직 시료였다. 나머지 두 데이터는 하마 B인 어미와 하마 C인 새끼의 전혈이었다. 연구진이 상아나 칼, 옷에서 직접 DNA를 채취한 것은 아니다.

하마 유전체의 추정 크기는 약 31억 염기다. 연구진은 시료마다 100염기 길이의 리드 3억1,000만 개, 합계 약 310억 염기를 사용해 유전체를 약 10번 읽는 깊이로 맞췄다. DNA 글자가 놓일 위치를 알려주는 참조 유전체도 썼다. 길이 100만 염기를 넘는 스캐폴드 41개에서 반복서열과 양 끝 50만 염기를 제외하고, 중앙에 가장 가까운 SNP 하나씩을 골랐다. 최종 SNP의 읽기 깊이는 12∼14, 매핑품질은 40 이상이었고 대체 대립유전자 비율이 0.3을 넘는 지점만 남겼다. 수백억 개 글자를 읽고도 확률 계산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소수의 단서만 쓴 셈이다.

같은 하마 A의 네 프로필을 두 개씩 비교한 여섯 조합에서는 이형접합 SNP 21∼25개가 일치했고 불일치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강한 상아–칼 혈흔 비교는 25개 일치, 0개 불일치로 무작위 일치확률이 1.69×10⁻⁷, 원식으로 약 593만분의 1이었다. 이는 무관한 다른 개체가 우연히 같은 프로필을 보일 확률이지, 두 시료가 같은 하마일 확률이나 누군가의 유죄 확률이 아니다. 가장 적은 21개가 일치한 칼 혈흔–옷 혈흔 비교도 2.04×10⁻⁶, 약 49만분의 1이었다. 다른 개체와 비교하면 11∼19개 불일치가 생겨 모두 배제됐고, 어미–새끼도 10개 일치와 13개 불일치로 구분됐다.

‘빈도표 없음’은 ‘참조지도 없음’이 아니다

HARP의 reference-free라는 표현에는 경계선이 있다. 각 DNA 프로필이 얼마나 흔한지 적은 ‘빈도표’는 쓰지 않지만, 하마 분석에서는 DNA 글자를 어디에 맞출지 알려주는 고품질 참조 유전체를 사용했다. 정확한 유전자형 판독, 비교 시료, 독립 SNP 선별과 오류율 검증도 여전히 필요하다. 눈표범과 큰잎단풍나무 사례 역시 실제 증거물 쌍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기존 연구의 마커 수, 결측률, 이형접합도로 각각 예상 일치 SNP 15개와 40개를 계산한 이론 사례였다.

현장으로 가기 전 풀어야 할 문제는 더 크다. 생물학적 표본은 세 개체뿐이었고, 같은 하마의 네 자료는 비교적 양질의 조직 유전체에서 만든 기술적 반복이었다. 부패한 사체, 상아, 마른 혈흔, 칼날, 옷감, 오염·혼합·열화 시료에서는 시험하지 않았다. s=0.1도 하마에서 잰 오류율이 아니라 인간 유전체 문헌을 바탕으로 둔 가정이다. 가까운 친족에 대해서는 부모와 자식만 비교했을 뿐 형제자매는 시험하지 않았다. SNP 하나의 시퀀싱·정렬 오류만으로 같은 개체를 잘못 배제할 수 있어 허용 불일치 기준도 검증해야 한다.

확률을 곱하려면 SNP들이 독립적이거나 연관불평형, 즉 가까운 DNA 변이가 함께 유전되는 경향을 충분히 줄여야 한다. 연구진은 스캐폴드마다 하나만 남겼지만 실제 하마 개체군에서의 연관불평형 검정 결과는 제시하지 않았다. 편집·교정 전 원고의 결과·보충자료와 방법·논의 사이에는 이 조건을 두고 문구 충돌도 남아 있다. 논문은 2026년 7월 1일 채택돼 7월 9일 온라인 공개됐으며, 8월 3일 조사본은 Article in Press 상태다. 감식법은 사건 적용 전에 사전·실험실 내부 검증, 표준절차, 오염과 혼합 및 여러 기질 시험을 거쳐야 하지만 전장유전체 HARP는 아직 소규모 시연이다.

한국의 종 판별 기반과 ‘동일 개체’ 감식 사이

한국에서 HARP를 직접 검증하거나 현장·법정에 도입한 사례와 기업 서비스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립생물자원관은 2024년 DNA 바코드 정보를 누적 1만1,604종까지 구축했다. 같은 해 국가생물종목록 6만1,230종과 단순 비교하면 약 19.0%다. 그러나 DNA 바코드는 주로 종을 알아보는 짧은 서열이지 HARP의 개체 일치 확률을 위한 개체군 데이터베이스나 전장유전체가 아니다. 관세청은 2025년 3월부터 국립생물자원관·국립생태원·국립야생동물질병관리원과 밀반입 야생생물의 종 판별·보호 협업체계를 운영한다고 밝혔지만, 공개된 설명 역시 동일 개체 감식 체계는 아니다.

현장 시료의 난도는 국내 사례에서도 드러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연구진은 2020년 의뢰된 악어가죽 제품 5점을 분석해 샴악어로 종을 판별했다. 가죽과 뼈·발톱·이빨의 바깥쪽에서는 PCR 산물을 얻지 못했고, 두개골·턱뼈·발가락 뼈·발톱·이빨 안쪽에서야 DNA를 확보했다. 깨끗한 공개 유전체에서 성립한 계산이 실제 압수품의 손상과 오염을 견뎌야 한다는 과제가 선명해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질문은 분명해졌다. 종별 빈도 데이터베이스를 먼저 쌓지 못한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증거물이 같은 개체에서 나왔다는 주장의 힘을 보수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가. HARP는 그 가능성을 열었지만 아직 답을 확정하지 않았다.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현장 감식법의 완성’이 아니라 ‘종별 빈도표의 병목을 줄이는 확률 계산법의 소규모 시연’이다.

한국에서 DNA로 개체를 가려낸 자리는 수사가 아니라 복원이었다

같은 질문을 한국은 다른 목적으로 먼저 던졌다. 국립공원관리공단(현 국립공원공단)은 2013년 지리산 반달가슴곰 관리에 유전자 분석을 도입했다. 발신기를 달아 쫓는 방식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야생 적응력이 붙은 곰은 추적도 포획도 어려웠고, 발신기를 다는 일 자체가 곰에게 스트레스가 됐다. 대신 무인카메라와 헤어트랩(지나가는 동물의 털을 걸어 채취하는 장치)에서 모은 털뿌리로 개체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환경부는 2016년 1월 유전자 분석으로 그때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지리산 반달가슴곰 1개체를 새로 찾아냈다고 밝혔다.

목적이 다르니 요구도 달랐다. 복원 사업에서 필요한 답은 '몇 마리인가'와 '누구의 새끼인가'다. 밀렵 사건에서 필요한 답은 그 일치가 얼마나 드문 일인지를 숫자로 대는 것이다. 앞의 질문은 확률이 없어도 성립하지만, 뒤의 질문은 확률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털 한 올, 그리고 좁은 개체군이라는 조건

국내 사례는 이번 연구의 약한 고리를 그대로 비춘다. 헤어트랩에 걸린 털뿌리 한 올에서 뽑아내는 DNA는 양이 적고 이미 손상돼 있다. 하마 분석이 다룬 것은 조직에서 확보해 유전체를 열 번 겹쳐 읽을 만큼 넉넉했던 자료였다.

개체군의 크기도 변수다. 지리산 곰처럼 소수의 방사 개체에서 불어난 집단은 서로 혈연이 가깝다. 부모에게서 받은 두 글자가 서로 다른 지점 자체가 줄어들고, 친족끼리 우연히 겹치는 지점은 늘어난다. HARP가 부모와 자식만 견주고 형제자매는 시험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국내 적용에서 가장 먼저 걸릴 지점인 이유다. 뒤집어 보면, 복원 사업이 십수 년간 쌓아 온 개체별 유전자 자료는 그 종의 빈도표를 만들 재료이기도 하다. 빈도표를 건너뛰는 계산법과 빈도표를 갖추는 일은 서로를 대신하지 못한다. 어느 쪽이든 먼저 필요한 것은 손상된 시료에서 같은 지점을 반복해 읽어낼 수 있느냐다.

자료: 에든버러대학교, TRACE Wildlife Forensics Network, Springer Nature, NCBI, Society for Wildlife Forensic Science, UNODC, 관세청, 국립생물자원관, 국립과학수사연구원·환경부·국립공원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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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기자 dh.kim@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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