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석 달 만에 고쳐 쓴 성장률 3.2%…반도체 슈퍼사이클의 두 얼굴

임형광 기자 · 입력 2026.08.20 12:39 · 수정 2026.08.20 12:37
KDI 상향분 0.7%p 중 0.6%p가 ‘반도체 몫’…7월 수출 40%가 반도체, 취업자 전망은 17만→11만 뒷걸음
[기획] 석 달 만에 고쳐 쓴 성장률 3.2%…반도체 슈퍼사이클의 두 얼굴
SK하이닉스 ‘2026 하반기 기술사무직 신입 채용설명회(Talent hy-way Recruiting)’ 행사장을 참가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회사는 서울·대구·청주·광주 4개 도시 설명회에 4,000여 명이 다녀갔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SK하이닉스 뉴스룸)

국책연구기관이 석 달 만에 성장률 전망을 0.7%포인트 끌어올렸다. 상향분 가운데 0.6%포인트, 사실상 전부가 반도체 몫이다. 그런데 같은 보고서에서 올해 취업자 증가폭 전망은 17만 명에서 11만 명으로 깎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19일 내놓은 ‘경제전망 수정’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며 가격과 투자가 함께 치솟는 초호황 국면)이 한국 경제의 성적표와 체감 경기를 어떻게 갈라놓고 있는지 숫자로 보여준다. 2017~2018년 메모리 호황, 2020~2021년 팬데믹 특수에 이어 이번에는 인공지능(AI)이 불을 댕긴 세 번째 큰 물결이다. 수출과 설비투자는 뜨겁고, 고용과 소비는 미지근하다.

성장률 절반 이상이 반도체

KDI는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3.2%로 제시했다. 지난 5월 전망(2.5%)보다 0.7%포인트 높다. 내년 전망도 1.7%에서 2.2%로 올렸다. 현실화하면 2021년 이후 5년 만에 가장 높은 성장률로, 정부와 한국은행, 국제기구의 전망을 모두 웃도는 수치다. 석 달 새 0.7%포인트를 고쳐 쓴 것은 그만큼 실물 지표가 전망을 앞질러 갔다는 뜻이다.

상향의 근거는 한곳으로 모인다. 김미루 KDI 거시·금융정책연구부장은 상승분 0.7%포인트 중 0.6%포인트가량이 반도체와 그 파급 효과에서 나온다며, 전체 성장률의 절반 이상이 반도체 관련이라고 설명했다.

부문별 수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KDI는 글로벌 AI 인프라 투자 확대에 힘입어 올해 설비투자가 반도체를 중심으로 7.9% 늘어날 것으로 봤다. 5월 전망(3.3%)의 두 배가 넘고, 내년에도 7.0% 증가가 이어진다. 상품 수출 증가율 전망은 4.6%에서 8.7%로 높아졌다. 여기에 국제유가 전제까지 낮아지면서 올해 경상수지 흑자는 5월 전망보다 1,200억 달러 많은 3,597억 달러로 불어났고, 내년에도 비슷한 규모가 이어질 것으로 봤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은 올해 2.7%, 내년 2.2%로 유지했다.

월 400억 달러 — 숫자로 본 국내 호황

전망을 끌어올린 것은 이미 나와 있는 국내 실적이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수출입 동향을 보면 7월 수출은 989억 달러로 월간 기준 역대 두 번째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가 약 410억 달러다. 1년 전 같은 달의 2.8배 수준으로, 월 400억 달러대 반도체 수출은 두 달째 이어졌다.

비중으로 보면 7월 수출 10달러 중 4달러가 반도체 한 품목에서 나온 셈이다. 반도체를 품은 정보통신기술(ICT) 수출도 534억 달러로 역대 7월 중 가장 많았다. 수입은 685억 달러 수준에 그쳐 같은 달 무역수지는 303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주요 9개 수출 시장 가운데 8곳에서 수출이 늘어 훈풍이 반도체 밖으로도 번졌지만, 증가분의 무게중심은 단연 반도체였다. AI 서버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통로를 넓힌 메모리) 등 서버용 메모리가 증가세를 이끌었다.

“부르는 게 값” — 가격 결정력의 이동

호황은 가격표에서도 확인된다. 로이터통신은 삼성전자가 지난달 신규 주문분부터 일부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가격을 최대 15% 올렸다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4나노 공정(회로 선폭을 나노미터 단위까지 좁힌 최첨단 공정) 가격은 중국·미국 고객사에 10~15%, 대만 고객사에 5~10% 인상됐고, 5나노 웨이퍼는 10~15%, 구형인 8나노도 10% 안팎 올랐다는 것이다. 미국의 수출통제로 첨단 위탁생산 창구가 좁아진 중국 설계업체들이 가장 큰 인상폭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삼성전자 측은 세부 경영 사안은 밝히지 않는다며 논평하지 않았다.

같은 보도에 따르면 평택의 4나노 생산라인은 지난해 말부터 풀가동 상태다. 퀄컴 칩과 함께 자사 HBM에 들어가는 베이스 다이(적층 메모리 맨 아래에 놓이는 기반 칩)를 찍어내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 매출의 70% 이상을 가져가는 대만 TSMC의 첨단 공정이 AI 칩 주문으로 가득 차자, 점유율 7%의 삼성전자에도 값을 부를 여지가 생겼다는 분석이다. 로이터통신은 인상 기조가 이어지면 삼성 파운드리 사업이 이르면 내년 흑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애널리스트 전망도 함께 전했다. 공급자가 가격을 정하는 국면, 슈퍼사이클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설명회에 4,000명, 취업자 전망은 뒷걸음

열기는 채용 창구에도 몰렸다. SK하이닉스가 이달 13일부터 서울 양재 엘타워를 시작으로 대구·청주·광주까지 4개 도시에서 연 하반기 신입 채용설명회에는 4,000여 명이 다녀갔다고 회사는 밝혔다. 20일 서류 접수를 시작해 26일 마감하는 이번 공채는 설계·소자·R&D공정·양산기술 등 반도체 핵심 직무 전반을 뽑는다. 지난 6월 발표한 방침에 따라 학력·연령 제한을 없앴고, 자기소개서 대신 AI 활용 역량과 직무 전문성을 쓰는 서식을 도입했으며, 기존 20~30분 면접을 ‘반나절 심층면접’으로 바꿨다. 4분기에는 AI 해커톤을 열어 우수자에게 면접 직행 통로도 준다. 오는 24일까지 이어지는 설명회는 AI 역량을 주제로 한 세션과 현직 엔지니어가 상담에 나서는 멘토 토크로 채워졌다. 회사가 내건 구호부터 ‘AGI(범용 인공지능) 시대, 생각하는 힘’이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고용 온도는 다르다. KDI는 올해 취업자 증가폭 전망을 5월보다 6만 명 적은 11만 명으로 내렸다. 성장이 반도체에 집중됐는데 이 부문의 고용 비중이 작아 전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게 KDI의 설명이다. 민간소비 증가율 전망은 2.3%, 지방 부동산 경기에 발목이 잡힌 건설투자는 0.1%에 그친다. 김미루 부장은 “(반도체 호황의) 성과가 다수 가계의 소득으로는 아직 충분히 확산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취업자 증가폭은 20만 명으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수요 위축 땐 급둔화” — KDI가 남긴 경고와 과제

KDI는 이번 호황의 뿌리인 AI 투자를 위험 요인 첫머리에 함께 적었다. 김지연 KDI 경제전망실 전망총괄은 AI 기술 우위를 선점하려는 초기 투자 경쟁이 반도체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며, 투자 수요가 위축되거나 다른 나라와의 경쟁이 심해질 경우 성장세가 빠르게 둔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금 같은 막대한 투자가 무한정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KDI는 미국 관세정책의 불확실성과 중동 지정학적 갈등 재격화도 하방 위험으로 꼽았다.

데이터가 가리키는 과제도 뚜렷하다. 성장률의 절반 이상이 반도체 관련이라는 KDI 설명을 뒤집으면, 반도체를 걷어낸 한국 경제의 성장 온도는 1%대에 머문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출의 5분의 2가 한 품목에 쏠린 구조에서는 사이클이 꺾이는 순간 수출·투자·성장률이 함께 흔들린다. 직전 메모리 호황이 2019년 수출 급감으로 막을 내렸던 전례도 있다. KDI가 내년 건설투자 반등(2.7%)의 배경으로 든 것 역시 반도체 공장 증설이다.

결국 이번 수정 전망은 두 가지 주문을 동시에 담고 있다. 반도체가 벌어들이는 동안 호황의 과실이 가계 소득과 소비로 흘러들 통로를 넓히는 일, 그리고 반도체 다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숫자는 화려하지만, KDI가 성장률과 함께 내민 것은 ‘3.2%의 유통기한’에 대한 경고장에 가깝다.

자료: 한국개발연구원(KDI)·산업통상자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SK하이닉스 뉴스룸·로이터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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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광 기자 hg.lim@k-rnd.net
반도체·일반공학 — 공정·소자·파운드리·메모리 및 기계·전기·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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