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80%만 채우는 ESS의 나라… '물 배터리'가 성능 벽을 넘는다
배터리를 끝까지 채우지 말라 — 정부가 2020년 전국의 에너지저장장치(ESS·남는 전기를 대형 배터리에 담아뒀다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설비)에 내린 처방이다. 건물 안 설비는 80%, 바깥 설비는 90%까지만 충전하게 했다. 리튬 배터리 화재가 잇따르자 성능 일부를 접고 안전을 산 것이다. 충전량을 낮추면 그만큼 담을 수 있는 전기도 준다.
그러고도 불은 이어졌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한국전기안전공사 집계를 보면 2017년부터 2024년 6월까지 ESS 화재는 55건. 재생에너지를 늘릴수록 ESS가 더 필요한 나라에서 '타지 않는 배터리'는 미룰 수 없는 숙제가 됐다.
그 후보로 꼽혀 온 것이 물을 전해질(배터리 안에서 이온이 오가는 통로 물질)로 쓰는 수계 아연이온전지다. 불이 붙지 않는 대신 성능이 발목을 잡아 왔는데, KAIST 연구진이 그 벽을 허무는 전극 소재를 내놨다. 성능을 갉아먹던 '방해꾼' 양성자를 오히려 에너지 저장고로 돌려세운 발상의 전환이다.
충전율 낮추고도 8년간 55건… 시장은 26GW로 커진다
ESS 화재의 경과는 정부 발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민관합동 조사위원회가 2019년 6월 내놓은 결과를 보면 당시까지 확인된 화재만 23건, 그중 14건이 충전을 마치고 대기하던 중 일어났다. 조사위는 전기 충격에 대한 배터리 보호체계 미흡, 운영환경 관리 미흡, 설치 부주의, 통합 관리체계 부재의 네 가지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일부 배터리 셀에서는 제조 결함도 확인했다. 정부는 배터리 셀 안전인증과 옥내 설치용량 제한(600kWh)을 도입하고 검사 주기를 4년에서 1~2년으로 당겼지만, 그해 가을 5건이 다시 잇따랐다. 조사단은 이 가운데 4건의 원인을 '배터리 이상'으로 추정했다. 옥내 80%·옥외 90% 충전율 제한은 이때 나온 두 번째 처방이고, 2022년에는 세 번째 안전 강화 대책이 뒤따랐다.
그 뒤로도 통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2024년 국정감사에서 허성무 의원(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이 한국전기안전공사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21년 이후 화재 25건 중 23건이 꽉 채워진(만충) 상태에서 났다. 10건 중 9건꼴이다. 충전율 제한을 넘겨 적발돼 하향 조치된 사업장도 2024년에만 70곳에 달했다. 허 의원은 "산업부가 ESS 화재 대책을 세 번이나 마련했지만, 현재 ESS 충전율 제한 위반에 대한 제재 근거는 고시 수준"이라며 "관련 고시의 상위법화 등 다각적인 개선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장은 반대로 커진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커질수록 출렁이는 전력을 받아 둘 저장장치가 더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산업부는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근거로 2036년까지 국내에 약 26GW의 ESS가 필요하고 최대 45조4,000억원이 들 것으로 내다봤다. 2023년 10월 발표한 '에너지스토리지 산업 발전전략'에서는 2036년 세계시장 점유율 35%, 세계 3대 ESS 강국이라는 목표까지 내걸었다. 안전과 성장, 두 과제를 함께 풀어야 하는 형국이다.
물은 타지 않는다, 대신 성능이 발목을 잡았다
수계 아연이온전지는 이름 그대로 물이 바탕이다. 아연 이온이 양극과 음극 사이를 오가며 전기를 담았다 꺼내는 원리는 리튬이온전지와 같지만, 불붙기 쉬운 유기용매 전해질 대신 물 기반 전해질을 써 발화 위험이 낮고, 재료가 싸고, 환경 부담도 적다. 배터리를 건물 단위로 쌓아 두는 대형 ESS의 차세대 후보로 꼽혀 온 이유다.
문제는 성능이었다. 저장 용량과 충·방전 속도가 한계로 지적돼 왔고, 그 중심에 물속의 양성자(수소 원자에서 전자가 빠져나간, 가장 작은 양이온)가 있었다. 양성자가 전극에서 먼저 반응해 버리면 부산물이 쌓여 정작 전기를 저장할 아연 이온의 길목을 막는다. 그래서 양성자는 그간 억제해야 할 대상으로 통했다. 안전을 얻는 대신 성능을 내주는 거래가 수계 전지 안에서도 되풀이돼 온 셈이다.
저장 순서를 바꾸자 방해꾼이 일꾼이 됐다
KAIST 화학과 박선아 교수 연구팀은 이 구도를 뒤집었다. 지난 19일 KAIST 발표에 따르면 연구팀은 금속과 유기 분자가 그물처럼 이어져 미세한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린 2차원 전도성 금속-유기 구조체(MOF)에 아민 작용기(질소를 품은 화학 구조)를 심어 이온이 저장되는 순서 자체를 설계했다. MOF는 구멍이 많아 이온을 담기 좋지만 대개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데, 연구팀이 쓴 소재는 전기가 통하는 '전도성' MOF라 전극으로 쓸 수 있다. 전압이 높은 구간에서 큰 아연 이온을 먼저 구멍에 채우고, 낮은 구간에서 작은 양성자를 뒤이어 받아들이는 '순차 저장' 방식이다. 먼저 설치던 양성자를 뒤로 물리자 부산물 문제가 잦아들었고, 남은 공간에 들어온 양성자는 덤으로 에너지를 보탰다.
숫자가 성과를 보여준다. 새 전극 소재 'Cu₃(HHTATP)₂'는 1g당 368.7mAh를 저장했다. 소재 1g에 0.5A의 전류를 흘리는 조건에서 얻은 값이다. 충·방전을 16배 빠르게 몰아붙여도 처음 용량의 46.9%를 지켰다. 빨리 채울수록 저장량이 급감하는 배터리의 통념에 비춰 보면 절반 가까이를 지켜낸 수치다. 500회가 넘는 급속 충·방전 뒤에도 성능은 안정적이었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켐(Chem)'에 7월 7일 게재됐다. POSTECH 박근찬 석박사통합과정생과 이규원 석사가 공동 제1저자로 참여했고,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사업과 국가슈퍼컴퓨팅센터의 지원을 받았다.
실험실 전극과 발전소 사이
물론 이번 결과는 전극 소재 단계의 성과다. 논문이 보고한 용량도 소재 1g 기준의 수치로, 완성된 전지의 성능과는 구분해 읽어야 한다. 실제 ESS 제품이 되려면 전지 업계가 통상 거치는 셀·모듈 단위의 수명·안전 검증과 양산성 확인이 남아 있다. 연구진도 이번 성과를 완성이 아니라 원리의 확장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박선아 교수는 "기존에는 배터리 성능을 떨어뜨릴 수 있는 '방해꾼'으로 여겨졌던 양성자를 오히려 에너지를 더 저장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이번 원리를 다양한 전극 소재에 적용해 더 많은 에너지를 빠르게 저장할 수 있는 배터리를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성능을 깎는 안전'에서 '소재가 만드는 안전'으로
이번 연구를 국내 ESS 현실에 겹쳐 보면 시사점이 또렷하다. 지금까지의 안전 대책은 충전율 제한처럼 성능을 깎아 위험을 낮추는 운영 규제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국정감사 자료가 보여주듯 제한을 넘긴 사업장이 해마다 적발되고 만충 상태 화재도 계속됐다. 운영 규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진단 위에서 허 의원의 '제재 근거 상위법화' 주문이 나왔다.
정부 전략의 방향도 소재와 기술을 가리킨다. 산업부는 '에너지스토리지 산업 발전전략'에서 저장 방식 다변화, 시장 활성화와 보급 확대, 핵심기술 개발, 산업 기반 조성, 안전관리 체계 강화를 5대 전략으로 제시하며 리튬전지 편중을 완화할 차세대·장주기 기술 확보와 안전 강화를 나란히 올렸다. 화재 대응력을 갖춰 '신뢰받는 산업'으로 만든다는 조건도 달았다. 타지 않는 전해질을 쓰는 수계 전지는 두 과제가 만나는 지점에 있고, 성능이라는 오랜 병목을 원리 차원에서 걷어낸 이번 성과는 그 출발점에 해당한다. 저자들이 밝힌 대로 순차 저장 원리가 다양한 전극 소재로 확장된다면, '80%만 채우는 ESS'라는 임시 처방을 소재 단계의 안전 설계가 대신할 길이 열리는 셈이다.
자료: KAIST·산업통상자원부·대한민국 정책브리핑·한국전기안전공사(국회 국정감사 제출자료)·Che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