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피리딘의 장식은 그대로, 질소 자리만 바꿨다

탄소 다섯 자리와 질소 한 자리로 된 육각형 식탁을 떠올려 보자. 식탁에 달린 장식물은 하나도 떼지 않은 채 질소 자리만 바꾸면,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장식물과 질소 사이의 거리가 모두 달라진 새 식탁이 된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연구진이 피리딘에서 바로 이런 분자 편집을 구현했다. 다만 같은 질소 원자가 고리 안을 옮겨 다닌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새 질소를 넣고 원래 질소를 질소기체로 내보내 결과적으로 위치만 이동한 것처럼 만드는 ‘질소의 형식적 위치 전위’다.
왜 질소 한 자리의 이동이 중요한가
피리딘은 탄소 원자 다섯 개와 질소 원자 한 개가 육각 고리를 이루는 방향족 화합물이다. 방향족성이란 고리 전체에 전자가 퍼져 안정해진 성질을 뜻한다. 이 안정성 때문에 질소 위치를 바꾸려면 고리 내부 결합을 끊어 방향족성을 잠시 잃게 한 뒤, 다른 위치에서 고리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치환기, 즉 고리에 붙어 분자의 성질을 조절하는 원자단까지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기존에는 질소 위치가 다른 피리딘을 얻기 위해 각각 다른 출발물질에서 합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질소는 단순히 고리의 한 칸을 채우는 부품이 아니다. 질소의 위치가 달라지면 염기도, 수소결합의 방향, 금속과 결합하는 배위 방식과 생체 표적에 맞물리는 방향이 바뀔 수 있다. 질소를 분자 주소의 1번지로 보면, 탄소와 치환기는 그대로여도 기준점이 이동해 모든 치환기의 상대 주소가 달라지는 셈이다.
그 중요성은 의약품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2013년 1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미국에서 승인된 고유 신규 저분자 의약품 321개 가운데 82%가 질소 헤테로고리, 즉 질소가 포함된 고리 구조를 하나 이상 지녔다. 피리딘을 포함한 약물은 54개였고, 그중 90%는 질소 옆인 2번 위치에 치환기가 있었으며 55%는 치환기 두 개가 붙은 피리딘이었다. 이는 모든 의약품을 대상으로 한 통계가 아니라 해당 기간의 신규 저분자 의약품만 조사한 결과다.
무거운 이름표가 밝힌 질소의 출입
연구진은 동위원소 표지로 새 질소가 어디서 왔고 옛 질소가 어디로 갔는지 추적했다. 외부 질소 시약에 질소-15(15N), 즉 보통 질소보다 무거운 ‘수하물표’를 붙이자 최종 피리딘에 이 표지가 99% 넘게 편입됐다. 이때 생성물 수율은 87%였으며, 99%는 수율이 아니라 새 질소의 출처를 보여주는 동위원소 편입률이다.
반대로 원래 피리딘의 질소에 15N 표지를 붙였을 때는 질량전하비 m/z 29인 질소기체가 검출됐다. 표지가 없는 기질에서는 보통 질소기체에 해당하는 m/z 28이 나왔다. 탄소-13 추적 실험에서는 기존 고리 탄소들이 보존되는 것도 확인됐다. 새 질소의 편입, 기존 질소의 기체 배출, 다섯 탄소의 보존은 직접 확인된 증거다.
세부 반응 경로는 동위원소 실험과 DFT(컴퓨터로 분자의 에너지와 반응 경로를 계산하는 밀도범함수이론)가 강하게 뒷받침했다. 연구진은 하이드록실아민 첨가와 탈양성자화, 분자 내부 고리화, 일곱 원자로 된 1,3-디아제핀으로의 고리 확장, 이중고리 아지리디늄 형성, 분해와 질소기체 방출, 방향족성 회복이 차례로 일어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요 중간체 대부분은 반응이 빨라 직접 분리하지 못했다. 따라서 질소의 출입과 탄소 보존은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 사이의 모든 장면이 포착된 확정 경로는 아니다.
88%라는 숫자 앞에 붙어야 할 조건
대표 전위 반응은 미리 만든 활성 피리디늄염 0.2밀리몰에 외부 질소 시약 1.5당량과 탄산세슘 1당량을 넣고, 80℃에서 2시간 진행했다. 활성염부터 계산한 최고 분리수율은 88%였으며 생성물은 27.3밀리그램이었다. 반응 규모를 10밀리몰로 50배 키운 실험에서는 생성물 1.14그램을 74% 수율로 얻었다. 이는 산업적 대량생산이 아니라 실험실 그램 규모의 확인이다. 케톤 기질은 33%, 긴 알킬 사슬을 지닌 기질은 42%에 그치는 등 낮은 수율 사례도 있었다.
반응이 일어나는 ‘방’인 용매를 바꾸면 두 위치이성질체의 비율도 달라졌다. 한 기질의 핵자기공명(NMR) 측정에서 톨루엔은 88% 대 미량, DMF는 57% 대 23%였지만 에탄올에서는 24% 대 42%로 우세한 생성물이 뒤집혔다. 전체 용매 시험에는 두 생성물이 모두 미량인 경우도 포함됐다. 용매로 선택성을 조절할 가능성은 확인했지만, 모든 기질에서 원하는 질소 위치를 자유롭게 고르는 기술은 아니다.
단일·이중·다중 치환 피리딘과 복잡한 분자에도 적용했으며, 복잡 분자 패널의 전체수율은 15~45%였다. 시판 약물 비스모데깁, 아비라테론 아세테이트, 에토리콕시브를 출발물질로 쓴 전체수율은 각각 44%, 31%, 31%였다. 비스모데깁 유래 생성물 한 종은 단결정 X선 회절로 구조를 확인했지만 모든 생성물을 같은 방법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다. 잘되는 마지막 전위 단계의 88%를 약물 전체 변환 수율로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새 약이 아니라, 새 분자를 시험할 도구
이번 방법은 출발 피리딘에서 곧바로 끝나는 한 단계·한 용기 반응이 아니다. N-아미노화와 토실화, 알킬화를 거쳐 활성염을 만든 뒤 전위해야 하는 기본 4단계 공정이다. 원팟 반응은 남은 시약과 부산물이 전위를 방해해 실패했다. 자유 아민·알코올·카복실산은 보호기가 필요하며, 보호와 탈보호까지 더하면 조작이 5~6회로 늘어날 수 있다. 지나치게 전자가 부족한 일부 피리딘과 융합 고리에도 한계가 확인됐다.
외부 질소 시약과 염기를 쓰고 원래 질소를 버리며, 비교적 묽은 조건과 실리카겔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한다는 공정 부담도 있다. 일부 시약은 불안정하거나 폭발 위험이 있어 취급 장벽이 존재한다. 기존에 각 이성질체를 처음부터 만드는 합성법과 총수율·시간·비용·폐기물을 직접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빠르고 경제적인지도 아직 판단할 수 없다.
‘피리딘 질소 전위의 세계 최초’라고 부를 수도 없다. 2025년에는 질소 원자 전위라는 이름의 관련 연구가 있었고, 2026년 6월에는 맨체스터대 연구진이 피리딘 C–N 전위법을 먼저 공개했다. 이번 연구의 차별점은 다섯 고리 탄소와 여러 치환기를 비교적 폭넓게 보존하면서 외부 질소 삽입과 기존 질소 삭제를 통해 부모 피리딘의 위치이성질체에 접근했다는 데 있다.
연구진은 세 약물의 위치이성질체를 합성하고 구조를 확인했지만 항암효과, 효소 억제, 용해도, 독성, 대사 안정성이나 약동학은 시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더 좋은 약을 발견한 성과가 아니라, 이미 만든 복잡한 분자에서 질소 위치를 구조활성관계의 새 변수로 시험할 합성 도구를 추가한 성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독립 연구팀의 재현, 더 넓은 기질 적용, 산업 규모 확대와 실제 생물활성 평가는 앞으로 답해야 할 질문이다.
자료: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과학기술원(KA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