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수십억 년의 진화를 몇 주로 압축하다, 컴퓨터가 처음부터 그린 효소

손창한 기자 · 입력 2026.07.23 17:25 · 수정 2026.09.07 13:28
촉매 잔기의 위치를 지정하지 않는 생성 AI로 설계한 아연 효소, 방향 진화 없이 천연 효소의 성능 대역에 진입… 도구가 공개되는 만큼 DNA 합성 검문도 시험대에
[기획] 수십억 년의 진화를 몇 주로 압축하다, 컴퓨터가 처음부터 그린 효소
미국 워싱턴대 단백질설계연구소(IPD) 연구원들이 연구소 복도에서 대화하는 모습. (사진 출처=UW Institute for Protein Design)

실험실에서 처음 만들어 본 단백질 96개 가운데 다섯 개가 작동했다. 그중 가장 빠른 하나는 그때까지 사람이 설계한 어떤 금속 가수분해 효소보다 수백 배 빠르게 반응을 돌렸다. 방향 진화도, 뒤이은 손질도 없었다. 계산에서 곧장 나온 분자였다.

미국 워싱턴대 단백질설계연구소(IPD)가 아연 이온 하나를 심장부에 박은 가수분해 효소 'ZETA'를 설계해 지난해 12월 3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보고한 결과다. 논문의 공동 제1저자는 이 대학 생화학과의 김동효(Donghyo Kim) 연구원 등 세 명이고, 2024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베이커 교수가 교신저자로 참여했다.

가장 질긴 결합을 끊는 일

금속 가수분해 효소는 생명이 다루는 결합 가운데 특히 질긴 것들을 끊는다. 단백질의 펩타이드 결합이나, 잘 분해되지 않아 환경에 쌓이는 인공 화합물이 그런 표적이다. 논문도 새로운 금속 가수분해 효소를 만드는 일이 사람이 만들어낸 환경 오염물질의 분해와 관련해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비결은 단백질 안에 붙잡아 둔 금속 이온에 있다. 아연에 붙들린 물 분자에서 수소가 떨어져 나가 반응성 높은 수산기가 되고, 그 수산기가 기질의 결합을 정확히 겨냥해 때린다. 이 일이 성립하려면 원자 몇 개가 나노미터 단위로 제자리에 놓여야 한다. 문제는 그 배치를 사람이 백지에서 짜 넣기가 지독히 어렵다는 것이다.

위치를 정해 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기존 생성 인공지능인 RFdiffusion으로 효소를 설계하려면, 촉매 잔기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이 서열 몇 번째에 오는지와 골격 좌표가 어디인지를 사람이 미리 지정해야 했다. 촉매 잔기가 늘어날수록 지정해야 할 조합은 지수적으로 불어난다. 정답이 어디 있는지 모른 채 주사위를 굴리는 셈이었다.

후속 모델 RFdiffusion2는 그 전제를 걷어냈다. 연구진은 반응의 전이 상태와 맞물리는 작용기 몇 개의 원자 좌표만 던져 주고, 어느 잔기가 서열 몇 번째에 오고 곁사슬이 어떻게 접힐지는 모델이 설계 과정에서 스스로 정하도록 열어 뒀다. 표적 자리 자체는 양자화학 계산으로 아연-수산기가 에스터 결합을 공격하는 순간의 이상적 기하를 뽑아 정의했다.

효과는 계산 단계에서 먼저 드러났다. 41개의 서로 다른 활성부위를 담은 자체 벤치마크에서 RFdiffusion2는 41개 전부를 감싸는 단백질 골격을 만들어냈다. 같은 문제에서 종전 최고 수준의 방법이 성공한 것은 16개였다. 베이커 연구실의 우디 어헌 연구원은 지난해 말 후속 모델인 RFdiffusion3를 공개하면서 "자연에서 제약 조건을 빌려 오는 대신 모델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편이 창의적인 해법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성능표에 드러난 두 회차

성적을 매긴 기질은 4-메틸움벨리페릴 페닐아세테이트다. 효소가 결합을 끊으면 형광을 내는 조각이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반응이 얼마나 빨리 도는지를 빛의 세기로 읽을 수 있다.

실험은 두 차례 돌았다. 1차에서 설계한 96개 중 86개가 발현됐고 다섯 개가 활성을 보였다. 그중 ZETA_1은 히스티딘 세 개가 아연을 붙들고 아스파르트산이 물을 활성화하는 구조로, 촉매 효율(kcat/KM)이 1만6000 M⁻¹s⁻¹에 이르렀다. 3~60에 머물던 종래 설계 효소를 수백 배 앞지른 값이다. 함께 활성을 보인 나머지 네 개는 35~140 수준이었으니, 1차 회차의 성과는 사실상 이 한 분자에 몰려 있었다.

설계 원리를 되먹여 돌린 2차 회차에서 ZETA_2는 5만3000 M⁻¹s⁻¹, 회전율(kcat) 초당 1.5회까지 올라갔다. 천연 금속 가수분해 효소의 촉매 효율이 대체로 1만~1억 M⁻¹s⁻¹ 대역에 걸쳐 있으니, 그 대역의 아래쪽 문턱을 넘어선 셈이다. 결정 구조를 찍어 보니 아연이 결합한 상태에서 설계 모델과 골격이 거의 포개졌고(Cα 편차 0.8Å), 촉매 잔기들이 의도한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연을 빼면 활성이 사라지고 되넣으면 살아났으며, ZETA_1은 최소 1000회전을 견뎠다.

흥미로운 것은 설계된 효소들이 서로도, 알려진 천연 효소와도 골격이 딴판이었다는 점이다. 같은 반응을 푸는 해법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고, 모델이 자연의 설계도를 베끼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직 헐거운 곳

완성된 기술은 아니다. 설계 효소의 아연 결합력(KD 약 41nM)은 천연 효소(대개 10nM 미만)보다 헐거웠다. 물을 활성화하는 염기 잔기가 금속 쪽으로 방향을 틀어 효율을 갉아먹을 여지도 남았다. 연구진은 금속 결합 잔기를 더 단단히 고정하고 산소 음이온을 붙드는 자리를 보태면 가장 빠른 천연 효소에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봤다. 종래 방식인 방향 진화, 즉 무작위 변이와 선별을 거듭하는 담금질을 아예 대체했다기보다, 그 출발점을 훨씬 높은 곳으로 옮긴 결과에 가깝다.

한국은 예측과 결합에서 앞서 달린다

국내 단백질 설계 연구도 같은 흐름에 올라타 있지만, 무게중심은 다른 곳에 있다. KAIST는 최근 국산 바이오 인공지능 모델 'K-폴드(K-Fold)'를 공개했다.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약물 후보가 표적 단백질의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붙을지를 미리 계산하는 모델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AI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사업' 과제다. 화학과 김우연 교수가 총괄하고 생명과학과 오병하·김호민·이규리 교수팀이 데이터 구축과 검증을 맡았으며, 지난 3월 단계평가에서 분자 복합체 구조 예측 정확도가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3에 근접한 수준으로 평가됐다. 모델은 무료로 배포되며, KAIST 교원창업기업 히츠가 이를 연구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웹 플랫폼 '하이퍼랩'으로 구현해 국내외 연구자 대상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설계 쪽 성과도 나왔다. 이규리 KAIST 생명과학과 교수팀은 베이커 교수 연구진과 함께 특정 화합물을 골라 인식하는 인공 단백질 여섯 종을 설계해 지난 3월 28일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검출하는 바이오센서로 작동하는 것까지 실험으로 확인했다. 다만 국내에서 공개된 대표 성과들은 구조 예측과 결합(바인더) 설계 쪽에 몰려 있다. 워싱턴대가 내놓은 것은 예측이나 결합이 아니라 반응을 돌리는 촉매 자체의 설계다. 무엇에 붙을지를 계산하는 일과, 무엇을 끊을지를 계산하는 일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설계가 쉬워질수록 검문도 따라가야

이 흐름의 다른 쪽 면은 이미 공식 진단으로 나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진은 지난해 10월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생성형 단백질 설계 도구로 리신 같은 우려 독성 단백질의 변형체를 만들자 DNA 합성 업체들이 쓰는 생물보안 스크리닝을 수천 건이 통과해 버렸다고 보고했다. 2023년 말 시작해 2년간 비공개로 진행한 연구였고, 연구진은 결과를 공개하기 전에 관련 기관들과 함께 탐지 알고리즘을 고쳐 배포했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 '책임 있는 AI 바이오디자인(Responsible AI x Biodesign)' 서약이다. 180곳이 넘는 개발 주체가 서명했고, 위험한 생체분자가 제조되기 전에 걸러지도록 DNA 합성 스크리닝 개선을 지원한다는 약속을 담았다.

설계 도구는 계속 공개되는 쪽으로 간다. 워싱턴대는 ZETA 논문의 설계 스크립트와 함께 RFdiffusion2를 공개했고, 지난해 12월에는 계산 속도를 열 배 끌어올린 RFdiffusion3까지 오픈소스로 내놓았다. 자연에 진화할 시간이 없었던 인공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촉매를, 긴 담금질 없이 설계 단계에서 곧장 얻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 길이 넓어지는 속도만큼, 무엇이 합성돼도 되는지 걸러내는 검문의 속도도 시험대에 올랐다.

자료: 네이처, 네이처 메소드,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사이언스, 워싱턴대 단백질설계연구소, KAIST,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저작권자 © 한국R&D신문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손창한 기자 ch.son@k-rnd.net
화학·물리·의학·생명 — 신소재·촉매·양자·물성, 의학·제약·바이오
댓글 0 최신순 추천순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0 / 400 · 회원 로그인 시 닉네임으로 작성 · 비회원 수정은 작성 후 1분 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