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자석을 꺼도 길을 기억한다…스핀파 방향 바꾸는 비휘발성 교차점

철길과 선로전환기가 같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면 어떨까. 열차가 달리는 선로가 앞서 설정된 방향을 기억했다가 다음 열차의 진로까지 정하는 셈이다. 독일 뮌스터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연구진은 이와 비슷한 기능을 미세한 자성체 안에서 구현했다. 폭 700 nm(나노미터·10억분의 1m)의 교차점에 1.4 GHz, 즉 1초에 14억 번 진동하는 스핀파를 보내자 파동은 직진하지 않고 미리 저장된 자화 방향에 따라 좌우 가지 중 하나로 꺾였다. 700 nm는 머리카락 굵기를 70 μm로 가정하면 약 100분의 1이다.
선택된 출력에서 측정한 스핀파 진폭은 입사 진폭의 90%를 넘었다. 네 갈래로 파동이 흐릿하게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한쪽 가지에 강하게 모였다는 의미다. 다만 이는 전력이나 에너지 전달 효율이 90%라는 뜻은 아니다. 연구진은 자화 상태를 설정한 뒤 스핀파를 전파시키는 동안 외부 바이어스 자기장을 가하지 않았다. 논문은 2026년 10월 22일 공개됐다.
신호가 지나는 선로가 경로까지 기억한다
스핀파는 자성체 내부에서 전자들의 스핀이 집단적으로 흔들리며 전달되는 파동이다. 물결이 물 자체를 멀리 옮기기보다 출렁임을 전달하듯, 스핀파도 자성체 안의 질서 있는 흔들림을 통해 정보를 나르는 대상으로 연구된다. 이번 장치에서 그 통로가 된 물질은 이트륨 철 가넷(YIG)이다.
핵심은 스핀파 도파로, 곧 파동이 지나가는 미세 선로가 별도의 메모리 소자 없이 경로 정보까지 저장한다는 데 있다. 좁고 긴 YIG 도파로에는 형상 이방성이라는 성질이 작용한다. 물체의 모양 때문에 자화가 특정 방향을 더 안정적으로 향하려는 현상이다. 외부 자기장을 제거해도 각 도파로의 자화가 길이 방향을 따라 남을 수 있는 이유다. 이렇게 남은 잔류 자화가 비휘발성 기억 역할을 한다. 비휘발성이란 지속적으로 외부장을 걸어두지 않아도 설정된 상태가 남는다는 의미다.
두 도파로가 직각으로 만나는 교차점에서는 자화가 한 도파로 방향에서 다른 도파로 방향으로 회전한다. 이때 탈자장을 포함한 내부 유효 자기장이 대각선 모양의 장벽을 만든다. 스핀파는 이 장벽의 방향에 따라 한쪽 출력으로 꺾인다. 저장된 자화 방향을 뒤집으면 장벽도 반대쪽으로 바뀌고, 선택되는 출구 역시 바뀐다. 선로 위에 별도 스위치를 얹은 것이 아니라 선로의 자기적 상태가 스위치가 된 것이다.
‘제로필드’는 초기화조차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번 결과에서 제로필드는 운전 중 전역 바이어스 자기장이 0이라는 뜻이다. 연구진은 실험 전에 100 mT(밀리테슬라)의 초기화 자기장을 x축 기준 +45° 또는 −45° 방향으로 잠시 가했다. 이후 자기장을 제거한 상태에서 전파를 측정했다. 따라서 외부 자기장을 한 번도 쓰지 않았거나 자기장 없이 자화를 기록했다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는 자화 상태를 먼저 설정한 뒤에는 외부 바이어스 자기장을 계속 가하지 않고 작동한 것이다.
실험 장치는 GGG 기판 위에 액상 에피택시로 성장시킨 YIG 박막을 전자빔 리소그래피와 아르곤 이온 밀링으로 가공해 만들었다. 폭 700 nm, 두께 120 nm인 도파로 두 개가 직각으로 교차한다. 금 안테나가 스핀파를 발생시켰고, 연구진은 위상 분해 마이크로초점 브릴루앙 광산란(BLS)으로 파동의 움직임을 살폈다. BLS는 레이저를 시료 위에서 옮기며 산란된 빛을 기준광과 간섭시켜 스핀파의 진폭과 위상을 지도처럼 그리는 측정법이다.
측정된 분산관계, 즉 주파수와 파동 특성 사이의 관계는 MuMax3 미세자기 시뮬레이션과 대체로 일치했다. 실험 도파로에서는 자화와 나란히 진행하는 후진 체적 스핀파가 관측됐으며, 바이어스 자기장이 0인 상태에서도 주파수가 1 GHz를 넘었다. 초기화 방향을 +45°에서 −45°로 바꾸자 1.4 GHz 스핀파가 향하는 옆 가지도 반대로 전환됐다.
교차로 하나에서 네트워크 가능성으로
연구진은 더 작은 구조와 복수의 교차점을 컴퓨터 안에서 시험했다. 폭 200 nm, 두께 50 nm인 축소 도파로 시뮬레이션에서는 2.05 GHz 미만에 분산의 주파수 중복 영역이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를 피한 2.2 GHz를 작동점으로 골랐다. 이때 파장은 약 250 nm였고, 꺾인 파와 입사파의 진폭비는 최대 0.9로 계산됐다. 이는 특정 축소 모형의 계산 결과이며, 실제 소자에서 모든 교차점이 언제나 정확히 같은 비율을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수평 도파로 3개와 수직 도파로 2개로 이뤄진 모의 네트워크에서는 저장된 자화 배열에 따라 입력파가 서로 다른 출력으로 향했다. 인접한 교차점 중심 사이의 거리는 1.5 μm였다. 5 ns(나노초) 펄스를 보내 경로를 여러 차례 꺾는 계산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네트워크와 펄스 전송은 실제 제작·측정 결과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이다.
개별 경로를 선택적으로 기록하는 방법 역시 계산으로 제안됐다. 12 mT의 전역 보조장이 있는 상태에서 선택한 교차점의 500×500 nm² 영역에 1.0 mT의 국소장을 더해 자벽을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약 1 mA는 이 국소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전류 규모를 단순 추산한 값이다. 실제 기록 실험값이 아니며 배선 저항과 전압, 펄스 길이, 발열 정보가 없기 때문에 기록에너지로 환산할 수도 없다.
완성형 칩 아닌 ‘프로그램 가능한 교차로’
이번 연구의 직접적인 성과는 저손실 신호선과 비휘발성 기억 기능을 같은 YIG 구조에 담을 가능성을 단일 교차점에서 보였다는 데 있다. 지속적으로 켜 두는 바이어스 자석과 별도 메모리 재료를 줄일 수 있는 구성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의 결과는 완성형 칩이나 실제 도로망보다는 현미경 아래에서 검증한 프로그램 가능한 교차로 하나에 가깝다.
남은 질문도 많다. 자화 상태가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 몇 번까지 반복해 기록할 수 있는지, 오류율과 온도별 안정성 및 소자 간 편차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량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교차점이 늘어나면 감쇠와 반사, 모드 혼합, 제작 편차가 누적될 수 있다. 연구진은 영자장 파라메트릭 증폭으로 손실을 보상할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증폭기를 이번 라우팅 네트워크 안에 통합해 검증하지는 않았다.
입출력 방식도 과제다. 실험에서는 금 안테나로 스핀파를 만들고 BLS 광학장비로 읽었다. 제품형 회로에 필요한 전기식 발생·검출의 효율과 면적, 전력, CMOS 공정 연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YIG 안에서 스핀파가 전하 이동 없이 전파되더라도 안테나와 기록 배선, 증폭기, 검출 회로까지 포함한 전체 시스템에서 전력과 발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YIG의 낮은 손실과 실리콘 양산 공정의 호환성 역시 별개의 검증 대상이다.
논문 공개 이틀 뒤인 2026년 10월 24일 기준으로 독립 재현이나 구체적인 외부 학술 반론은 확인되지 않았다. 검증을 통과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 판단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번 성과는 자화가 기억한 방향으로 스핀파를 보내는 최소 구성요소를 실제로 보여준 출발점이다. 이제 한 개의 교차로가 장기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여러 교차로를 연결해도 신호와 기억이 함께 유지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자료: 독일 뮌스터대학교·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독일연구재단·서울대학교·한국과학기술원·충남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