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힉스 이후, 입자물리는 어디로 — 91km 충돌기를 둘러싼 논쟁

우주 전체가 보이지 않는 끈끈한 시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입자는 그 속을 힘겹게 헤치고 가고, 어떤 입자는 거의 방해받지 않고 지나간다. 이 비유에서 입자가 느끼는 저항이 ‘질량’이다. 시럽과 강하게 부딪히는 입자일수록 무겁고, 그대로 통과하는 빛의 알갱이인 광자는 질량이 0이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힉스장(온 우주를 채운 보이지 않는 장)이 바로 이 시럽에 해당한다.
힉스 보손은 힉스장 자체와는 다르다. 힉스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의 들뜸’, 곧 파동이다. 물 위의 물결을 보고 그 아래 물이 있음을 알 수 있듯, 물리학자들은 힉스 보손을 찾아 힉스장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 그 탐색에는 이론이 나온 뒤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48년을 기다려 채운 ‘마지막 조각’
표준모형은 자연을 이루는 기본 입자와 그 상호작용을 설명하지만, 처음에는 왜 광자의 질량은 0이고 다른 입자는 무거운지를 설명할 장치가 없었다. 1964년 프랑수아 앙글레르와 로베르 브라우, 피터 힉스가 각각 독립적으로 제안한 힉스 메커니즘이 그 빈칸을 채웠다.
결정적인 순간은 2012년 7월 4일 찾아왔다.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의 지하 약 100m에 설치된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대형강입자충돌기 LHC에서 ATLAS와 CMS 두 실험이 각각 새로운 입자를 관측했다고 발표했다. 측정된 질량은 약 125GeV였고, 통계 유의도는 5시그마에 도달했다. 5시그마는 관측 결과가 우연히 나타났을 가능성이 극히 낮아 입자물리학계가 ‘발견’을 선언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다.
예측에서 발견까지 약 48년이 걸렸다. 앙글레르와 힉스는 201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힉스는 자신이 예언한 입자가 실제로 발견되는 장면을 생전에 지켜본 뒤 2024년 4월 8일 94세로 별세했다.
힉스 보손은 흔히 ‘신의 입자’라고 불리지만, 이는 물리학적 명칭이 아니다. 별명은 노벨상 수상자 레온 레더먼이 1993년에 낸 책의 제목에서 비롯됐다. 검출이 너무 어려워 원래 ‘빌어먹을 입자’라고 부르려 했지만 출판사가 제목을 바꿨다. 대다수 물리학자는 과장된 인상을 준다며 이 별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표준모형은 완성됐지만 우주는 설명되지 않았다
힉스 발견은 표준모형의 마지막 조각을 채웠다. 그러나 이는 물리학의 마지막 질문에 답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표준모형이 무엇을 설명하지 못하는지가 더 선명해졌다.
첫째는 암흑물질이다. 은하의 회전과 우주 구조는 보이지 않는 물질의 존재를 가리키지만, 표준모형에는 그에 해당하는 후보 입자가 없다. 둘째는 계층 문제다. 양자 보정을 계산하면 힉스의 질량은 훨씬 커야 하는데 실제로는 왜 이처럼 가벼운지 설명되지 않는다. 셋째는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이다. 우주에는 반물질보다 물질이 훨씬 많지만, 표준모형만으로는 그 차이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힉스는 끝이라기보다 새로운 측정의 출발점이 됐다. 힉스가 다른 입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더 정밀하게 재면 표준모형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미세한 균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실험물리계의 기대다.
27km에서 91km로, 왜 더 커야 하나
2008년 가동한 LHC는 둘레 약 27km의 초전도 자석 링이다. CERN은 먼저 기존 시설을 고광도 LHC(HL-LHC)로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대규모 정비는 2026년 7월 시작되고, 물리운전인 Run 4는 2030년 6월로 예정돼 있다. 목표는 지금까지 약 5,500만 개 만들어진 힉스를 약 3억8,000만 개까지 늘려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다.
그다음 후보가 미래원형충돌기 FCC다. CERN이 2025년 3월 발표한 타당성 보고서에 따르면 FCC의 둘레는 약 91km로 LHC의 3배가 넘고, 지하 약 200m에 놓인다. 1단계 FCC-ee는 힉스를 대량 생산해 정밀 측정하는 ‘힉스 공장’으로 구상됐다. 건설비 추정치는 150억 스위스프랑, 약 180억 달러이며 2040년대 가동을 상정한다.
충돌기가 거대해지는 이유는 입자의 에너지를 더 높이면서 원형 궤도로 휘게 하려면 더 강한 자석과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FCC는 아직 건설이 확정된 사업이 아니다. 재원 확보와 CERN 이사회의 결정이 남아 있으며, 결정은 대략 2028년경으로 예상된다. 중국도 둘레 약 100km의 유사한 CEPC를 더 저렴한 계획으로 제안했지만, 2025년 기준 5개년 계획에 포함되지 않아 사실상 보류된 상태다. 향후 상황은 유동적이다.
새 물리학을 향한 유일한 길인가, 보장 없는 투자일까
CERN과 다수 실험물리학자는 깨끗한 충돌 환경에서 힉스를 정밀 측정하면 표준모형의 미세한 어긋남, 즉 새로운 물리학의 힌트를 붙잡을 수 있다고 본다. 더 높은 에너지에 도달하는 충돌기는 암흑물질을 비롯한 미지의 영역을 직접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도 편다.
반론도 뚜렷하다. 이론물리학자 자비네 호센펠더는 수백억 달러를 투입하더라도 새로운 입자나 현상의 발견은 보장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LHC의 경험만으로 ‘더 큰 충돌기가 반드시 답을 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재원을 기후와 감염병 문제에 투입하는 편이 낫고, 우선 충돌기 기술을 개선해 비용을 낮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91km 링을 둘러싼 질문은 단순히 기계를 얼마나 크게 만들 것인가에 머물지 않는다. 힉스를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우주의 남은 수수께끼를 풀 최선의 경로인지, 확실한 발견을 약속할 수 없는 탐색에 사회가 어느 정도의 비용을 감수할 것인지가 함께 걸려 있다. 2012년의 발견은 표준모형을 완성했지만, 그 완성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의 크기를 보여줬다.
충돌기 없는 한국, 실험과 데이터로 참여해 왔다
한국은 91km 링의 결정 당사자가 아니지만, LHC 실험의 오랜 참여자다. 정부는 2006년 CERN과 국제협력협정을 맺었고, 국내 대학들은 그보다 앞서 1997년부터 힉스를 관측한 두 실험 중 하나인 CMS에, 1998년부터는 ALICE 실험에 합류했다. CERN이 집계한 한국인 등록 연구자는 144명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2013년부터 ALICE의 실험 데이터를 나눠 맡는 최상위 거점인 1등급(Tier-1) 데이터센터를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운영해 왔다.
다만 국내 가속기 투자의 무게중심은 충돌기가 아니다. 2020년 3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확정한 대형가속기 장기로드맵은 방사광·양성자·중이온·중입자 등 활용형 시설을 축으로 삼았다. 그 대표 격인 중이온가속기 라온에 들어간 돈은 약 1조5,000억 원으로, FCC 건설비 추정치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2025년 3월에는 대형가속기 구축·지원법이 제정돼 같은 해 9월 시행에 들어갔다.
부다페스트의 권고, 2028년의 결정
기사 속 논쟁은 지난 5월 공식 절차의 관문 하나를 지났다. CERN 이사회는 2026년 5월 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럽입자물리전략을 갱신하며, FCC 1단계인 전자-양전자 충돌기 FCC-ee를 차기 주력 사업의 우선 후보로 권고했다. 힉스를 비롯한 표준모형의 미해결 질문에 가장 폭넓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건설 여부는 과학·기술·재정 타당성을 따져 2028년까지 이사회가 결정하기로 했고, 그때까지 CERN이 각국 정부의 판단을 도울 이행 보고서를 해마다 내놓는다.
한국 쪽 제도도 정비돼 있다. 국회는 대형가속기법 제정 이유에서 가속기를 기초과학과 소재·반도체·신약 개발의 핵심 기반시설로 규정했고, 법에는 전문인력 양성기관 지정과 국공유재산 최장 50년 대부 같은 지원 장치를 담았다. 91km 충돌기의 운명이 2028년에 갈리는 만큼, ‘힉스 이후’의 질문에 한국이 어떤 자리를 잡을지도 같은 시간표 위에 올라 있다.
자료: CERN·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기초과학연구원·국가법령정보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