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겉만 초전도, 속은 평범한 금속…'표면만 얼어붙는' 결정이 양자컴퓨터의 문을 열까
결정 하나를 극저온으로 식히면 겉면에서만 전기 저항이 사라지고, 속은 끝까지 평범한 금속으로 남는다. 게다가 그 겉면의 전자들은 여섯 방향으로는 짝을 짓지 못한다. 교과서 어디에도 없던 이 초전도가, 오류에 강한 양자컴퓨터를 '물질 하나'에서 시작해 보려는 경쟁의 최전선에 독일 드레스덴의 회색 결정을 올려놓았다.
독일 라이프니츠 고체·재료연구소(IFW 드레스덴)와 뷔르츠부르크-드레스덴 엑설런스 클러스터 ct.qmat 연구진은 지난해 11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백금-비스무트 결정 PtBi₂의 표면 초전도가 'i파(i-wave)'라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전자쌍을 만든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2024년 2월 같은 네이처에 실은 '표면만 초전도' 논문의 후속으로, 2년에 걸쳐 한 물질의 그림을 완성한 셈이다.
연구를 이끈 세르게이 보리센코 IFW 드레스덴 박사는 공식 보도자료에서 "이런 것은 본 적이 없다. PtBi₂는 위상 초전도체일 뿐 아니라, 초전도를 일으키는 전자 짝짓기부터 우리가 아는 다른 모든 초전도체와 다르다. 이 짝짓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했다. 성과를 말하면서 그 원리를 모른다고 함께 적는, 물리학에서 드물게 솔직한 문장이다.
짝짓기의 지문에 찍힌 여섯 번째 무늬
초전도는 특정 온도 아래에서 전기 저항이 완전히 사라지는 현상이다. 전자 둘이 짝(쿠퍼쌍)을 이뤄 방해 없이 흐르는 것이 핵심인데, 이 짝짓기가 방향에 따라 어떤 규칙을 갖느냐가 초전도체의 지문 노릇을 한다. 흔한 금속 초전도체는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짝을 짓고(s파), 구리 산화물 고온 초전도체는 네 방향으로 짝이 끊기는 d파를 보인다.
연구진이 각분해 광전자분광법(ARPES·빛을 쏘아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와 방향으로 물질 속 전자 지도를 그리는 기법)으로 확인한 PtBi₂ 표면의 지문은 각운동량 6에 해당하는 i파였다. 여섯 개의 대칭적인 방향을 따라 전자쌍이 만들어지지 않는 '마디(node)'가 생기고, 이 여섯 갈래 금지선은 표면 원자 배열이 120도씩 돌려도 똑같아 보이는 3회 회전 대칭에서 비롯한다. 이런 6차 짝짓기가 실제 물질에서 실험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샌드위치의 정중앙에서 나온 마요라나 신호
이야기의 앞선 절반은 2024년 논문에 있다. PtBi₂는 바일 준금속(전자가 질량 없는 입자처럼 움직이는 특이 물질)으로, 그 표면에만 '페르미 호(Fermi arc)'라는 끊어진 활 모양의 전자 상태가 흐른다. 연구진은 이 페르미 호가 약 10K(영하 263도) 안팎에서 초전도로 바뀌는 반면 결정 속(벌크)은 정상 금속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였다. 페르미 호에 갇힌 전자의 초전도가 확인된 첫 사례였고, 결정 하나가 저절로 초전도-금속-초전도 샌드위치가 되는 셈이어서 두께만 조절하면 조지프슨 접합(두 초전도체 사이로 전류가 새어 흐르는 양자소자)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제안이 따라붙었다.
같은 물질을 주사터널링현미경으로 훑은 별도 논문(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2024)은 표면 초전도 갭(전자쌍을 깨는 데 필요한 에너지 문턱)이 위치에 따라 0~20meV로 들쭉날쭉하다고 보고했다. 위상 물질에서 측정된 갭으로는 가장 큰 값이지만, 표면이 균일하지 않다는 숙제를 같이 남긴 결과다.
지난해 논문이 채운 나머지 절반은 마디의 위치다. 짝짓기가 끊기는 여섯 마디는 하필 페르미 호의 정중앙에 정확히 놓였고, 그 주위 운동량 공간에 위상적으로 보호되는 '마요라나 원뿔'이 생긴다는 것이 이론 계산으로 뒷받침됐다. 계산은 한발 더 나가, 결정 표면의 계단형 가장자리에 에너지 0의 마요라나 상태가 띠처럼 늘어선다고 예측했다. 이론을 이끈 예룬 판 덴 브링크 IFW 이론고체물리연구소장은 "우리 계산은 PtBi₂의 위상 초전도가 물질 가장자리에 갇힌 마요라나 입자를 저절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결정에 계단 모양 가장자리를 인위적으로 내서 원하는 만큼 마요라나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8큐비트 칩과 편집진의 주석 — 검증이 절반인 경쟁
마요라나 입자는 자기 자신이 곧 반입자인 기묘한 상태다. 둘이 정보 하나를 나눠 담기 때문에 한쪽에 생긴 잡음이 정보 전체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이 성질로 오류에 강한 양자비트(큐비트)를 만들자는 것이 위상 양자컴퓨팅이다. 다만 이 분야는 '주장'과 '검증' 사이의 간극이 유난히 깊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해 2월 반도체 나노선에 초전도체를 입힌 소자로 위상 큐비트 8개를 담았다는 칩 '마요라나 1'을 발표했지만, 같은 시기 네이처에 실린 논문은 큐비트 시연이 아니라 소자 판독 방법 보고에 그쳤다. 네이처 편집진은 "이 논문의 결과는 마요라나 영점 모드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니다"라는 주석까지 달았고, 지난해 3월 미국물리학회 학회장에서도 회의적인 평가가 이어졌다고 사이언스와 APS 피직스가 전했다.
PtBi₂ 경로의 차별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소자를 먼저 만들어 놓고 마요라나의 존재를 다투는 대신, 물질 자체가 위상 초전도라는 분광학적 증거를 먼저 쌓는 순서다. 물론 갈 길은 남았다. 초전도는 여전히 10K 아래 극저온에서만 나타나고, 마요라나는 아직 측정이 아니라 계산이 가리키는 단계이며, 두 마요라나를 엮어 계산에 쓰는 조작(브레이딩)은 어느 진영도 시연하지 못했다. i파 짝짓기가 어떤 상호작용에서 나오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래도 후속은 이어지고 있다. 올해 3월 미국물리학회 학술대회에 관련 후속 발표가 올랐고, 학술지 어플라이드 피직스 리뷰스에는 이 물질의 현황과 전망을 정리한 리뷰 논문이 실렸다. 연구진은 결정을 얇게 깎아 속을 절연체로 바꾸고, 자기장으로 마요라나를 가장자리에서 모서리로 옮기는 실험을 다음 단계로 꼽는다.
2031년 1000큐비트 — 한국 로드맵에서 '물질'의 자리
한국의 국가 계획은 다른 층에서 움직이고 있다. 정부가 2023년 6월 내놓은 '대한민국 양자과학기술 전략'은 2035년까지 민관 합동 최소 3조원(정부 2조4000억원)을 투자해 선도국 대비 기술 수준 85%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고, 양자컴퓨터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등을 중심으로 2027년 50큐비트급, 2031년 1000큐비트급 초전도 기반 시스템 개발을 시간표로 잡았다. 4년 만에 규모를 20배로 키우는 계획이다. 이후 '양자과학기술 및 양자산업 육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제도적 기반도 갖췄다.
즉 한국 로드맵의 무게중심은 이미 작동이 검증된 초전도 '회로' 방식으로 큐비트 수를 쌓는 경쟁에 있다. 드레스덴의 성과는 그보다 한 층 아래, 큐비트의 재료가 될 위상 물질을 찾아 검증하는 단계의 경쟁이다. 위상 큐비트는 마이크로소프트조차 실증 논쟁에 갇혀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도 초기 단계라 당장 국가 시간표에 오를 성격은 아니지만, 결정 성장과 초정밀 측정, 위상 이론이 맞물려야 하는 기초 체력 싸움이라는 점에서 회로 방식과는 다른 근육을 요구한다.
'인력이 최우선'이라는 전략의 자기 진단
그 기초 체력에 대한 진단은 한국 정부 문서 안에 이미 적혀 있다. 양자과학기술 전략은 2022년 기준 국내 양자 핵심인력을 384명으로 집계하고, 인력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2035년까지 2500명, 지금의 6배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이번 PtBi₂ 연구가 결정 합성, ARPES 측정, 위상 이론 그룹이 한 연구소와 지역 클러스터 안에서 맞물려 나온 결과라는 점은, 그 인력이 어떤 조합으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실물 사례에 가깝다.
마이크로소프트 논쟁이 남긴 교훈도 있다. 위상 큐비트 분야에서는 발표보다 독립 검증이 성패를 가른다는 점을, 학술지 편집진이 게재 논문에 이례적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공개적으로 보여줬다. 겉만 얼어붙는 이 회색 결정의 다음 시험대는 마요라나를 실제로 만들고 움직이는 일이다. 그 결과에 따라 위상 큐비트 경쟁의 출발선은 다시 그려질 수 있다.
자료: 라이프니츠 고체·재료연구소(IFW 드레스덴), 엑설런스 클러스터 ct.qmat, 네이처(Nature),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사이언스(Science), APS 피직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