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토륨-229 핵시계, 결정 속 '숨은 4개 자리'를 찾아 정밀도 걸림돌을 풀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는 손목이 아니라 실험실 진공 장치 안에 있다. 원자 하나가 내는 빛의 색깔로 시간을 재는 원자시계는 수억 년에 1초도 어긋나지 않을 만큼 정밀하다. 그런데 이보다 한 단계 더 정확한 시계를 만들 실마리가 나왔다. 열쇠는 원자의 가장 바깥쪽 전자가 아니라, 원자 한가운데 웅크린 원자핵이다. 일본 오카야마대학과 오스트리아 TU Wien(빈공과대학) 등이 참여한 26명 규모 국제 공동연구팀이 방사성 원소 토륨-229(229Th)를 결정 속에 심어, 이 원자핵들이 사실은 하나가 아니라 성질이 서로 다른 4개의 자리에 나뉘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전자 대신 원자핵을 쓰면 왜 더 정확할까
지금 쓰이는 원자시계는 원자 바깥을 도는 전자가 특정한 에너지를 흡수·방출하는 순간을 세어 시간을 잰다. 전자는 원자 바깥에 노출돼 있어 주변 자기장이나 열의 흔들림에 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다. 반면 원자핵은 전자에 둘러싸여 더 깊숙이 보호받고 있어 외부 교란에 덜 민감하다. 이론상 원자핵의 에너지 변화를 시계추로 쓰는 핵시계가 원자시계보다 정밀할 잠재력을 지녔다고 보는 이유다.
문제는 대부분의 원자핵을 들뜨게 하려면 인류가 아직 만들지 못한 감마선 레이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토륨-229는 예외다. 알려진 모든 원자핵 가운데 유일하게, 실험실에서 이미 다루는 자외선 레이저 수준의 약한 에너지(파장 약 148nm, 진공자외선 영역)로도 핵을 들뜨게 할 수 있는 낮은 전이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 특이한 성질은 1976년 처음 추정된 이래 50년 가까이 정밀 측정과 검증을 거치며 예외적 후보로 주목받아 왔다.
결정 속에 숨어 있던 '4개의 동'
연구팀은 토륨-229를 칼슘불화물(CaF2) 결정에 미량 심은 뒤, 토륨 농도가 다른 3개의 결정 샘플을 만들어 실온(293K)에서 레이저로 조사했다. 그 결과 결정 속 토륨 원자들이 하나의 균일한 환경에 놓인 게 아니라, 저마다 전기장 조건이 다른 4개의 별개 자리에 나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비유하자면 한 아파트 단지에 입주한 사람들이 볕과 소음 환경이 저마다 다른 4개의 동에 나뉘어 사는 것과 비슷하다. 세 결정 샘플 모두에서 이 가운데 2개 자리가 검출된 신호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우세 자리였고, 나머지 2개는 신호가 매우 약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자리마다 핵이 들뜬 상태에서 가라앉는 방식, 즉 소광(quenching) 효율이 다르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토륨 원자가 결정 속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핵시계로서 성능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반면 들뜬 상태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 즉 핵 이성체의 수명은 자리와 무관하게 약 630초(10분 남짓)로 일정하게 측정됐다. 원자 세계에서 10분 넘게 들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오래 버티는 축에 속하며, 정밀 시계로 쓰기에 유리한 조건으로 꼽힌다.
감마선 기법을 자외선 레이저로 확장하다
이번 성과의 바탕에는 측정 기법 자체의 확장이 있다. 원래 뫼스바우어 분광법은 생화학이나 지질학, 고체물리학에서 감마선을 이용해 물질의 미세 구조를 들여다보는 기법이다. 오카야마대학 다카히로 히라키 특임조교수와 요시무라 고지 교수 연구팀은 TU Wien 토르스텐 슈뭄 교수 연구팀 등과 함께 이 기법을 처음으로 진공자외선 레이저 영역까지 확장한 레이저 뫼스바우어 분광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으로 결정 속 토륨 원자를 자리별로 골라 들뜨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4개 자리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이번 결과는 2026년 8월 20일 국제학술지 Science 393권 6813호(795~799쪽)에 실렸다.
이 연구는 하루아침에 나온 결과가 아니다. TU Wien 연구진은 토륨을 결정에 심어 다루는 고체 기반 방식을 15년 넘게 이끌어 왔다. 이는 진공 장치 안에 이온 하나만 가두는 단일 이온 기반 방식과 경쟁하면서도 병행되는 핵시계 개발의 한 축이다. 2024년에는 여러 연구팀이 CaF2 등 결정과 박막에서 레이저로 토륨 핵을 공명 여기시키는 데 처음 성공했고, 이번 연구는 그 연장선에서 결정 속 자리를 모두 식별하고 특성을 밝혀낸 것이다.
의의와 남은 과제
오카야마대학은 이번 결과가 성능이 개선된 고체 기반 핵시계용 결정을 설계하고 준비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된다고 밝혔다. 다만 이번 성과로 당장 작동하는 핵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신호가 약한 나머지 2개 자리의 정확한 원자 구조는 이번 연구에서도 규명되지 못한 채 과제로 남았고, 90% 이상 신호를 차지하는 우세 자리 중 하나의 정체를 둘러싸고도 밀도범함수이론 계산을 이용한 이론적 재해석 논쟁이 진행 중이다. 4개 자리 가운데 일부는 비대칭적인 전기장을 갖고 있어 오히려 핵시계의 정확도를 해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연구는 완벽한 자리를 찾아낸 것이라기보다, 앞으로 쓸 자리와 피해야 할 자리를 구분한 지도를 처음 그려낸 것에 가깝다는 평가다.
재현 가능한 결정 품질을 확보하는 일도 아직 정교한 과학이라기보다 경험적 시행착오 단계에 가깝다. 연구자들은 결정을 키우는 과정을 요리나 연금술에 비유할 만큼 미세한 조건에 예민하다고 말한다. 148nm 대역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협대역 연속파 레이저도 아직 없어, 현재 자외선 레이저의 정밀도는 토륨 핵이 요구하는 정밀도 수준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연구에 한국 기관이나 연구자가 참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별도로 이터븀 원자시계를 한국형 위성항법시스템에 탑재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지만, 이는 원리와 연구 주체가 전혀 다른 별개의 사업이다.
자료: 오카야마대학, 오스트리아 TU W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