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스탠퍼드, AI 에이전트 3만7000개 '가상 바이오텍'이 임상시험 5만5984건 스스로 분석해 신약 성공 패턴 찾아냈다

손창한 기자 · 입력 2026.09.19 07:25
정밀 타격형 신약이 임상 통과율 높아…폐암 표적 가설은 수개월 뒤 업계 결과와 맞아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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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Wikimedia Commons (LPS.1), CC0 1.0)

임직원이 3만7000명인 회사인데, 그 안에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연구진이 만든 이 '가상 바이오텍(가상 제약회사)'은 컴퓨터 안에서만 존재하는 인공지능(AI) 에이전트들로 이뤄져 있다. 이 조직은 임상시험 등록 기록 5만5984건을 1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분석해, 어떤 신약이 임상시험을 통과할 확률이 높은지 가르는 패턴을 찾아냈다. 사람이 손으로 직접 이 방대한 기록을 정리하려면 수년이 걸린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도서관 책 5만여 권을 일주일 만에 다 읽고 요약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다.

사람 없는 제약회사, 조직은 어떻게 짜였나

스탠퍼드대 생의학데이터과학과 제임스 저우 부교수와 대학원생 해리슨 장이 이끈 연구팀은 실제 제약회사의 조직 구조를 본떠 이 가상 바이오텍을 설계했다. 최고과학책임자 역할을 맡은 에이전트가 조직 전체를 총괄하고, 그 아래로 신약이 공략할 표적을 찾는 부서, 분자나 항체 같은 치료 방식을 설계하는 부서, 부작용 등 안전성을 평가하는 부서, 임상시험 기록을 분석하는 부서가 나뉘어 협업한다. 이들은 100개 이상의 데이터베이스와 분석 도구를 활용하며,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를 하나로 통합해 쓸 수 있도록 자체 데이터 플랫폼까지 구축했다. 이 연구는 같은 연구팀이 2025년 7월 선보인 소규모 '가상 연구실' 프로젝트의 후속작이다. 당시에는 AI 책임연구원과 여러 AI 학생 에이전트가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를 겨냥한 초소형 항체 후보 92개를 설계했고, 이 중 2개가 실제 실험에서 결합력이 좋아진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5만5984건의 임상시험에서 찾아낸 패턴

임상시험 분석을 맡은 에이전트들은 임상시험 등록 데이터베이스에 오른 기록 5만5984건(1상 1만4237건, 2상 2만2164건, 3상 1만4911건, 4상 4672건, 2025년 1월 이전 공개 데이터 기준)을 1주일 이내에 정리하고 분석했다. 신약 후보가 임상시험 단계에서 실패하는 비율이 통상 90%에 이른다고 알려진 만큼, 통과 확률을 가르는 요인을 찾는 일은 제약업계의 오랜 숙제였다. 분석 결과 확인된 핵심 패턴은 이렇다. 특정 세포 유형에서만 작동하는 유전자를 표적으로 삼은 '세포유형 특이적' 약물은 그렇지 않은 약물보다 1상에서 2상으로 넘어갈 확률이 40% 높았고, 최종적으로 시장에 출시(허가)되는 단계까지 도달할 확률은 48% 높았으며, 평균 이상반응(부작용) 발생률은 32% 낮았다. 여기저기 두루뭉술하게 작동하는 약보다, 특정 세포만 정밀하게 겨냥한 약이 임상시험이라는 여러 관문을 더 잘 통과했다는 뜻이다.

폐암 표적 CD276, AI의 가설이 현실과 맞아떨어지다

연구팀은 이 시스템이 실제로 쓸모가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 연구도 진행했다. 가상 바이오텍은 폐암 표적 단백질인 CD276(별칭 B7-H3)을 겨냥한 항체-약물접합체(항체에 약물을 결합시켜 암세포만 정밀하게 공격하는 치료 방식) 전략을 설계했는데, 이는 2025년 1월 이전에 공개된 데이터만으로 도출한 가설이었다. 그런데 수개월 뒤 한 제약회사가 이 결과를 참고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같은 표적을 겨냥한 유사한 치료 전략을 개발했고, 이 후보물질은 이후 미국 식품의약국의 혁신치료제(초기 임상 결과가 우수한 후보의 개발과 심사를 앞당겨주는 지정 제도) 지정을 받았다. 다만 연구팀은 이 사례가 AI가 새로운 약을 실제로 발명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AI가 미리 세운 가설이 사후에 업계의 독립적인 결과와 우연히 맞아떨어진 사례에 가깝다는 것이다.

관찰연구일 뿐…연구팀 스스로 밝힌 한계

연구팀은 이 시스템의 한계도 분명히 했다. AI 에이전트도 분석과 해석 과정에서 오류를 낼 수 있고, 한 번의 오류가 조직 전체로 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 임상시험 분석은 관찰연구이므로 결과를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로 해석해야 하며, 시험의 표적이나 적응증, 평가지표 정의, 자금지원 관계 같은 다른 요인이 결과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분석 범위 역시 분자 표적이 확인된 약물과 등록 데이터베이스에 오른 시험으로 한정되며, 전 세계 모든 임상시험을 포괄하지는 않는다. 폐암 표적 사례 역시 AI가 세운 가설일 뿐 추가 실험과 임상 검증이 필요하다고 연구팀은 강조했다. 외부 학계에서도 이 시스템이 아직 실제 신약 개발 현장에서 검증되지 않았고, 그 예측이 실험이나 임상시험으로 입증된 사례는 아직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번 연구 결과는 2026년 2월 정식 동료심사를 거치기 전 공개 논문(프리프린트) 형태로 먼저 알려졌고, 같은 해 9월 17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정식 게재됐다. 연구비는 미국 국립보건원과 국립과학재단, 민간 연구재단, 스탠퍼드대학교 등이 지원했다. 국내에 이에 상응하는 다중 AI 에이전트 신약개발 조직이나 이번 연구에 대한 국내 전문가·기관의 공식 반응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자료: 스탠퍼드대학교(스탠퍼드 의과대학),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미국 국립보건원, 미국 국립과학재단, 미국 식품의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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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한 기자 ch.son@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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