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탄소나노튜브에 가두자 물의 수소결합망이 무너졌다—‘액체인데 증기 같은’ 나노공간의 물

물이 든 방에 사람들이 북적이지만 서로 손을 거의 잡지 않는다면 어떨까. 머리카락 굵기의 대략 5만분의 1에 불과한 내경 1.4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의 탄소나노튜브 안에서 이와 비슷한 물의 신호가 포착됐다. 보통 액체 물에서 이웃 분자들을 이어주는 수소결합망이 약해지거나 빠르게 재편되고, 수증기의 고립된 물 분자와 가까운 O–H 진동이 우세해진 것이다. 제목의 ‘액체인데 증기 같은’ 물은 분광학적 비유다. 물이 끓어 실제 수증기로 바뀌었다거나 모든 수소결합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구 결과는 2026년 10월 7일 발표됐다. 핵심은 같은 물이라도 원자 크기의 통로에 들어가면 분자를 둘러싼 결합환경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상온 측정에서 내경 2.3나노미터 탄소나노튜브에서는 벌크 액체 물, 곧 용기 안에 충분히 많은 양으로 존재하는 보통 물과 비슷한 약 420밀리전자볼트(meV)의 신호가 우세했다. 반면 0.9나노미터 더 좁은 1.4나노미터 관에서는 자유 O–H에 가까운 약 455밀리전자볼트 신호가 두드러졌다. 불과 35밀리전자볼트의 차이가 물 분자 주변의 결합환경을 가르는 지문이 됐다.
물을 찍지 않고 ‘진동의 목소리’를 들었다
물 분자 하나는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둘로 이뤄지며, O–H는 산소와 수소 사이의 결합을 뜻한다. 액체 물에서는 한 분자의 수소와 다른 분자의 산소가 서로 끌어당기는 수소결합이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진다. 이 연결망은 O–H 결합이 떠는 방식과 에너지를 바꾼다. 이웃과 수소결합을 이룬 O–H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O–H가 서로 다른 진동 신호를 내는 이유다.
연구진은 움직이는 수소 원자의 배열을 전자현미경 사진으로 직접 찍지 않았다. 단색화 주사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진동 전자에너지손실분광법(vEELS), 즉 전자가 시료와 상호작용하면서 잃은 에너지를 분석해 분자의 진동을 읽는 방법을 썼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 ‘직접 측정’한 것은 수소결합의 개수나 수소 원자의 배치가 아니라 개별 탄소나노튜브 내부 물의 O–H 진동에너지다. 수소결합망이 약해지고 방향성이 흐트러졌다는 설명은 이 분광 신호에 양자 Morse 진동자 모형과 분자동역학 계산을 결합해 내린 구조적 해석이다.
2.3나노미터 관의 대표 스펙트럼에서는 결합된 O–H 성분의 신호 면적 가중치가 약 90%로 추정됐다. 1.4나노미터 관에서는 자유 O–H 성분의 스펙트럼 가중치가 약 86%였다. 이는 물 분자 10개 중 몇 개가 결합했다는 분자 비율도, 사라진 수소결합을 직접 센 값도 아니다. 자유 O–H 신호가 우세하더라도 약하거나 순간적인 수소결합은 계속 형성되고 해체될 수 있다.
나노튜브 한 가닥의 지름과 물의 신호를 연결하다
이전에도 좁은 탄소나노튜브 속 물이 보통 물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계산과 관측은 있었다. 이번 연구의 새로운 점은 여러 관에서 나온 신호를 평균내는 데 그치지 않고, 개별 탄소나노튜브의 지름과 그 안에 든 물의 진동 신호를 나노미터 공간분해능으로 연결했다는 데 있다.
실험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 연구진은 화학기상증착(CVD), 즉 기체 원료로 고체 물질을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탄소나노튜브를 만든 뒤 집속이온빔 등으로 잘라 입구를 열었다. 상대습도 99%가 넘는 환경에서 물을 채우고 절단부를 밀봉해 진공 상태의 전자현미경 안에서도 내부 물을 보존했다. 전자빔에 따른 손상을 줄이기 위해 빔을 관에서 약 30나노미터 비껴 쏘는 ‘알루프(aloof)’ 방식도 사용했다. 직접 조사한 결과와 큰 차이는 찾지 못했지만, 전자빔의 영향을 완전히 0으로 입증한 것은 아니다.
연구진은 실험 신호를 밀도범함수이론(DFT)에 기반한 분자동역학과 기계학습 퍼텐셜 계산 등과 비교했다. 계산 조건은 탄소나노튜브 지름 0.8~2.4나노미터, 온도 100~500켈빈, 물 밀도 0.10~1.25g·cm⁻³ 범위였다. 계산은 관의 지름만이 아니라 물의 밀도와 온도도 결합 O–H와 자유 O–H 신호의 상대적인 비중을 바꿀 수 있다고 제시했다. 원자 수준에서 탄소나노튜브 벽도 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 운동이 물의 빠른 결합 재편에 관여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벽의 진동만을 따로 조절한 실험은 아니어서 이를 확정된 단독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61개 중 8개에서 잡힌 신호, 해석에는 경계선이 있다
이번 결과는 선명하지만 표본의 한계도 뚜렷하다. 조사한 탄소나노튜브는 61개였고, 물 신호가 확인된 것은 8개였다. 이 가운데 5개가 자유 O–H형, 3개가 벌크 물형 신호를 보였다. 두 유형은 각각 서로 다른 3개 시료와 3회의 독립 측정 세션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8개라는 수를 탄소나노튜브의 보편적인 물 충전 확률로 해석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지름 차이도 특히 2.3나노미터와 1.4나노미터 시료에 크게 의존하므로, 1.4나노미터를 수소결합 붕괴의 보편적인 임계지름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물을 넣지 않은 비교군 53개 가운데 31개에서는 350~500밀리전자볼트 영역의 피크가 없었다. 나머지에서는 약한 배경이나 탄화수소 오염에 따른 신호가 나타났다. 탄소나노튜브의 엑시톤, 즉 전자와 정공이 결합한 들뜬 상태도 비슷한 에너지 영역에 신호를 낼 수 있다. 대조군과 에너지 변화는 물의 진동이라는 해석을 지지하지만, 모든 관에서 선명한 회절무늬와 키랄성을 확보하지 못해 전자적 신호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배제한 것은 아니다.
실험과 계산도 정량적으로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계산에서는 1.4나노미터와 2.3나노미터 관 모두에서 결합 O–H와 자유 O–H 두 성분이 함께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인 1.4나노미터 실험처럼 넓은 단일 피크에 가까운 결과를 얻으려면 계산 온도를 약 500켈빈까지 높여야 했다. 실제 대표 실험은 300켈빈, 약 27℃에서 이뤄졌다. 실제 관의 부분 충전과 오염, 결함, 지름 변화와 달리 계산은 결함 없는 약 2나노미터 길이의 이상적인 구조를 사용했다는 차이도 있다.
응용 성능보다 먼저 확인한 ‘작은 공간의 물’
온도를 300켈빈에서 100켈빈, 약 영하 173℃로 낮춘 실험에서는 약 400밀리전자볼트의 결합 O–H 성분과 상변화 징후가 나타났다. 얼음형 결합환경과 맞을 가능성은 있지만, 회절로 특정 얼음 결정구조를 확정하지는 못했다. 냉각과 재가열에 따른 변화도 비슷한 다른 관에서 정확히 재현되지 않아 저온 결과는 예비적인 관측으로 남았다.
한국과학기술원 연구진이 참여한 2011년 계산 연구도 탄소나노튜브 지름에 따라 증기형·얼음형·벌크 액체형 물의 안정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고 제시했다. 당시에는 0.8~1.0나노미터에서 증기형, 1.1~1.2나노미터에서 얼음형, 1.4나노미터 초과에서 벌크 액체형 환경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번 실험의 대표적인 자유 O–H 우세 신호는 1.4나노미터 관에서 나왔다. 두 결과는 지름별로 일대일 대응하지 않으며, 계산모형과 밀도, 관의 구조·결함·진동, 실험 조건의 차이를 더 밝혀야 한다.
이번 연구는 담수화막이나 배터리의 성능 향상을 입증한 응용 성과가 아니다. 실제 장치의 유량이나 분리율, 효율을 시험하지도 않았다. 의미는 더 기초적인 곳에 있다. 원자 몇 개 크기의 통로에서 물의 결합 상태를 개별 관 단위로 구별함으로써,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액체 물의 수소결합망이 공간이 극도로 좁아질 때 얼마나 다르게 조직될 수 있는지를 실험적으로 보여줬다. 이제 남은 질문은 어떤 지름과 밀도, 온도, 관의 구조가 이런 상태를 결정하는지, 그리고 다른 연구진의 독립적인 실험에서도 같은 신호가 재현되는지다.
자료: 스탠퍼드대학교·오크리지국립연구소·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밴더빌트대학교·미국 에너지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