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10억 달톤급 ‘전하 블록’ 분자 실, 신호 서열 없이 뉴런 돌기를 키웠다

작은 분자들이 물속에서 한 줄로 모여 세포 크기에 가까운 ‘분자 실’을 만들었다. 길이는 30마이크로미터(μm)를 넘었다. 0.03밀리미터라 맨눈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분자 조립체로서는 일반적인 세포 몸체와 비교할 만한 길이다. 더 놀라운 점은 크기보다 배열에 있었다. 섬유에 담긴 전하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뉴런에 강한 독성을 일으키기도 했고, 반대로 길고 복잡한 신경돌기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노스웨스턴대학교 연구진이 개발한 것은 10억 달톤급 초분자 중합체다. 달톤(Da)은 원자와 분자 질량을 나타내는 단위다. 일반적인 대형 플라스틱 고분자가 약 1000만Da인 것과 비교하면 약 100배 규모이며, 자연계 최대급 단백질인 약 300만~500만Da와 견주면 약 200~330배 수준이다. 다만 정확히 10억Da인 하나의 거대 분자를 합성한 것은 아니다. 작은 펩타이드 양친매성 단량체들이 가역적인 비공유결합, 즉 붙었다 떨어질 수 있는 약한 힘으로 조립돼 이룬 집합체다.
연구 결과는 2026년 10월 1일 국제학술지 《Science》에 발표됐다. 논문의 핵심은 거대한 섬유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양전하와 음전하 구간을 원하는 순서로 나눠 배치했다는 데 있다. 같은 전하 재료라도 전부 한쪽 전하로 만들거나 무작위로 섞었을 때와, 뚜렷한 블록으로 나눴을 때 세포 반응이 달라졌다.
재료가 떨어지면 스스로 끝을 접는 분자 실
일반 플라스틱은 원자들이 강한 공유결합으로 이어진 하나의 긴 분자다. 이번 섬유는 작은 단량체들이 물속에서 비공유결합으로 모인 초분자 중합체다. 약한 결합으로 이뤄졌다면 쉽게 흩어질 것 같지만, 연구진이 만든 구조는 시험관에서 수개월 유지됐다. 섬유 전체를 따라 이어진 비틀리지 않은 β-시트 코어가 구조를 지탱했다. β-시트는 펩타이드 사슬이 나란히 정렬돼 판처럼 결합한 구조를 뜻한다.
길이를 제어한 원리는 연구진이 ‘자기 캡핑 초분자 중합’이라고 이름 붙인 과정이다. 섬유를 자라게 할 단량체가 소진되면 유연한 말단이 접히면서 끝에 스스로 뚜껑을 씌운 듯한 휴면 상태가 된다. 이 접힌 끝은 섬유끼리 합쳐지거나, 작은 구조가 사라지고 큰 구조만 커지는 오스트발트 숙성을 억제한다. 오스트발트 숙성은 작은 입자의 물질이 큰 입자로 이동해 크기 차이가 벌어지는 현상이다.
새 단량체를 공급하면 닫혔던 끝에서 성장이 다시 시작됐다. 자동으로 뚜껑을 닫는 분자 레고에 다른 색 블록을 차례로 보태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진은 서로 다른 단량체를 순차적으로 넣어 한 섬유 안에 전하가 구분된 구간을 만들었다. 이 방식으로 30μm를 넘고 질량이 10억 달톤 단위에 이르는 섬유형 구조를 구현했다.
전하의 양보다 ‘어디에 놓였는가’가 갈랐다
뉴런 실험에서 두드러진 반응을 만든 구조는 짧은 양전하 중앙 블록을 길이가 서로 다른 두 음전하 블록 사이에 둔 섬유였다. 대조군의 결과는 선명했다. 전부 양전하인 섬유는 뉴런 생존에 강한 독성을 나타냈다. 전부 음전하인 섬유는 역시 음전하를 띠는 세포막과 서로 밀어내 뚜렷한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양전하와 음전하를 무작위로 섞은 섬유도 두드러진 반응을 만들지 못했다.
반면 전하를 구간별로 나눈 섬유 주변에서는 신경돌기가 길어지고 분지가 복잡해졌다. 신경돌기는 뉴런이 다른 세포와 신호를 주고받기 위해 뻗는 가느다란 가지다. 배양 7일 뒤 측정한 칼슘 활동은 무처리군의 약 4배였다. 칼슘 활동은 뉴런의 신호 반응을 살피는 지표이지만, 이 수치를 곧바로 ‘신경기능이 4배 좋아졌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배양 14일 뒤에는 시냅스 형성도 무처리군보다 증가했다. 시냅스는 뉴런 사이에서 신호가 전달되는 접점이다.
시험 대상에는 배양 피질 뉴런과 사람 신경전구세포가 포함됐다. 사람 신경전구세포는 평평한 층으로 머무는 대신 돌출된 3차원 군집과 이를 잇는 축삭 구조를 형성했다. 연구진은 이 형태가 뇌의 회백질과 백질 분리를 일부 닮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뇌 조직이나 회로 기능을 갖춘 오가노이드를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양전하 닻과 움직이는 음전하 팔
연구진이 제시한 작동 모델은 ‘닻과 팔’로 풀어볼 수 있다. 가운데의 짧은 양전하 블록은 음전하를 띠는 뉴런 막에 붙어 섬유를 세포 가까이에 고정하는 닻 역할을 한다. 양쪽의 음전하 블록은 세포막과 같은 전하라 서로 밀어내지만, 중앙의 닻에 연결돼 있어 멀리 떠나지 못한다. 그 결과 두 블록은 세포 주변에서 높은 운동성을 보였다.
연구진은 이 음전하 팔이 밀리초 시간 척도로 움직이며 주변 단백질을 모아 뉴런의 수용체 가까이에 반복적으로 제시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실제로 세포외기질 단백질인 라미닌이 뉴런 인근의 섬유를 따라 축적되는 현상도 관찰했다. 세포외기질은 세포 바깥에서 조직을 받치고 세포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단백질 환경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경계선이 있다. 이번 연구가 보여준 것은 특정 수용체 결합 신호 서열을 펩타이드 재료에 넣지 않고도 효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뉴런의 수용체가 필요 없었다거나 세포 내부의 수용체 신호전달을 우회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연구진의 가설은 섬유가 모은 주변 단백질이 결국 뉴런 수용체 가까이에 제시될 가능성을 포함한다.
라미닌의 축적은 관찰됐지만, 어떤 신경영양인자가 반드시 필요한지, 어떤 수용체와 하위 신호 경로가 관여하는지는 공개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특정 단백질을 제거하거나 수용체를 차단했을 때 효과가 사라지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움직이는 음전하 팔의 ‘두드림’이 성장 촉진을 직접 일으켰다는 인과관계 역시 아직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전하 상호작용과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한 기전 가설이다.
치료제가 아니라 설계 원리를 보여준 단계
이번 결과의 의미는 생체재료를 설계할 때 전하의 총량만 볼 것이 아니라 위치와 구간 길이, 운동성까지 변수로 다뤄야 한다는 데 있다. 전부 양전하인 섬유가 독성을 보였다는 사실은 같은 재료라도 전하 블록의 길이와 비율, 농도와 노출 조건에 따라 성장 촉진 대신 세포막 손상을 일으킬 수 있음을 경고한다.
연구는 세포배양 단계에서 수행됐다. 손상된 뇌나 척수에 투여한 동물시험도, 행동기능 회복을 확인한 연구도, 사람 대상 안전성·효능시험도 아니다. 시험관에서 수개월 안정했다는 결과 역시 체내 안정성을 뜻하지 않는다. 체액과 염, 효소, 혈청 단백질, 면역세포와 흐름이 있는 환경에서 섬유가 어떻게 응집·분해·분포·배설되는지는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10억 달톤급 구조가 혈뇌장벽을 통과하거나 뇌 조직에 고르게 퍼진다는 증거도 없다.
신경돌기와 분지, 칼슘 반응, 시냅스 표지의 증가는 유망한 배양 지표지만 정상적인 신경회로가 복구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출판 후 약 열흘이 지난 2026년 10월 11일 현재 독립적인 재현 결과도 확인되지 않았다. 동일한 전하 분절 초분자 섬유를 국내에서 재현하거나 사업화·임상시험 중이라는 근거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성과는 신경재생 치료제를 완성한 연구라기보다, 전하의 위치와 움직임이 세포 반응을 바꿀 수 있다는 재료 설계 원리를 세포배양에서 보여준 연구로 읽어야 한다. 작은 분자들을 얼마나 많이 모았는가보다, 거대한 분자 실 안에서 서로 다른 전하를 어떤 순서와 형태로 움직이게 했는지가 생물학적 결과를 갈랐다.
자료: 미국 국립의학도서관, 노스웨스턴대학교, 미국과학진흥협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