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 가위’, 세균 면역의 경보선을 자르다

손창한 기자 · 입력 2026.10.12 06:59
바이러스 머리 조립에 필요한 gp21의 작동을 역이용하는 CBASS의 ‘분자 인계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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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금고를 조립하려고 전동가위를 켰는데, 그 가위가 바닥에 숨겨진 경보선까지 잘라버린다면 어떨까. 세균과 박테리오파지의 싸움에서 이와 닮은 장면이 포착됐다. 박테리오파지 T4가 자신의 머리를 완성하려고 단백질 가위 gp21을 작동시키자, 세균 면역센서 EcCdnG에 달린 약 30개 아미노산 길이의 고리가 잘리며 방어 경보가 켜졌다. 침입자의 존재를 직접 알아보는 대신, 침입자가 복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반드시 수행하는 조립 작업을 감시하는 ‘분자 인계철선’이다.

Samuel J. Hobbs와 Philip J. Kranzusch가 2026년 10월 1일 발표한 연구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분해효소 활성이 세균의 type II CBASS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추적했다. CBASS는 ‘고리형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 기반 항파지 신호체계’로, 세균이 파지 감염을 감지해 세포 안에 경보 신호를 퍼뜨리는 면역체계다. 핵심은 파지의 가위가 면역센서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센서를 켠다는 점이다.

파지의 조립용 가위가 세균의 경보를 켰다

T4의 gp21은 프로헤드, 즉 아직 성숙하지 않은 파지 머리를 완성하는 단백질분해효소다. 단백질분해효소는 단백질의 특정 지점을 잘라 기능이나 형태를 바꾸는 ‘분자 가위’다. 연구진이 세포 안에서 gp21을 발현하자 CBASS에 의존하는 독성이 나타났다. 반면 gp21의 활성부위 H85와 S140을 알라닌으로 바꿔 가위 기능을 없애자 같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gp21이라는 단백질이 단순히 존재하거나 센서와 결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제 절단 활성이 필요하다는 증거다.

경보선은 별도의 덫 단백질이 아니었다. 신호 생성효소인 EcCdnG 자체의 표면에서 돌출된 약 30개 아미노산 길이의 무질서한 활성화 루프였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아무 기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단단히 접힌 구조보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부분이라는 의미다. 이 짧은 고리가 단백질 가위에 노출돼 있다가 절단되면 EcCdnG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연구진은 규명했다.

활성화된 EcCdnG는 3′2′-cGAMP라는 고리형 뉴클레오타이드 신호를 합성한다. 이는 세포 안에서 다음 방어 단계를 호출하는 화학 경보다. 신호를 받은 Cap5 같은 효과기, 즉 경보를 실제 대응으로 바꾸는 실행 단백질이 작동해 파지 증식을 억제한다. 그 결과 감염 세포가 휴면하거나 사멸할 수 있다. 다만 모든 CBASS가 반드시 세균의 ‘자살’로 끝나는 것은 아니며, 체계에 따라 세포가 살아남으면서 파지 생산이 줄어드는 결과도 가능하다.

절단점만 바꾸자 특정 파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연구진은 여러 실험용 단백질분해효소를 이용해 이 작동 원리를 더 세밀하게 확인했다. Trypsin을 처리했을 때 EcCdnG 활성화와 함께 약 28킬로달톤 크기의 절단 산물이 나타났다. 이어 루프 안의 K184·K197·K214·K218 네 자리를 모두 글루타민으로 바꾸자 trypsin에 대한 반응은 사라졌지만 proteinase K에 대한 반응은 남았다. 센서 전체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trypsin이 자를 수 있는 지점만 사라졌다는 뜻이다.

T4 gp21은 I/L-x-E 계열 서열의 글루탐산 뒤를 선호하며, EcCdnG 루프에는 LPE 배열이 있다. 이 배열 안의 P211 또는 그 옆의 Y213을 알라닌으로 바꾸자 T4에 대한 상대 방어능은 100배 초과 약화됐다. 그러나 다른 파지인 Bas51에 대한 방어는 유지됐다. 경보기 전원을 끈 것이 아니라 T4의 가위가 건드릴 경보선만 바꾼 셈이다.

루프에 있는 글루탐산 네 자리 E190·E194·E212·E215를 모두 글루타민으로 바꾼 변이도 gp21 발현과 T4에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Bas51 방어는 유지했다. 이는 서로 다른 파지의 단백질분해효소가 같은 센서 루프에서도 서로 다른 절단 서열을 이용할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다만 공개된 연구에서 정제 gp21이 정제 EcCdnG를 자르는 장면을 시험관에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gp21의 촉매활성 의존성, 세포 내 발현 결과, 루프 변이와 여러 실험용 단백질분해효소의 절단시험을 종합해 gp21 의존적 루프 절단 모델을 지지했다.

침입 직후가 아니라 조립라인이 돌 때 울리는 후기 경보

이 경보장치의 특징은 작동 시점에도 드러났다. 연구가 인용한 T4 프로헤드 형성 시점은 감염 후 약 12분이다. 연구진이 감염 세포의 용해물과 효과기 활성을 제거한 CBASS 용해물을 섞어 재구성했을 때 3′2′-cGAMP는 감염 후 14분 이상 된 시료에서 검출됐다. 두 수치는 같은 사건을 잰 것이 아니므로 ‘12~14분 동안 활성화됐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다만 파지가 침입한 즉시가 아니라 머리 조립 공정을 가동하는 복제 후반에 CBASS 신호가 나타났다는 시간적 흐름을 보여준다.

이 방식은 세균에 한 가지 이점을 줄 수 있다. 정상적인 머리 성숙에 필요한 효소활동은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세균이 침입자의 외형보다 필수 작업을 감시한다면 파지가 경보를 회피하기 위한 선택지는 좁아질 수 있다. 2024년에는 type I CBASS와 파지 975조합을 시험한 연구에서 파지의 회피 변이가 프로헤드 단백질분해효소 등 조립 관련 단백질에 집중되는 연관성이 제시됐다. 이번 연구는 다른 유형인 type II EcCdnG에서 단백질분해 활성에 따른 루프 절단이라는 구체적 기전을 제시했다. 두 CBASS 유형의 결과를 동일한 기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파지 조립 과정이 세균 면역의 중요한 감시 대상이라는 연결고리를 강화한다.

넓게 퍼진 원리일까, 치료용 파지 선별의 단서일까

구조·서열 분석에서는 조사한 CBASS 오페론의 약 24%에서 비슷한 활성화 루프가 예측됐다. Clade A·D·G의 여러 CD-NTase에서 같은 위치의 후보가 나타났고, 구조상 후보는 1,300개 초과였다. 그러나 이는 AlphaFold3를 포함한 계산·예측 결과다. 실제 정제 단백질로 기능을 시험한 것은 12종이었다. 루프가 예측된 9종 중 7종은 proteinase K에 반응했고, 루프가 예측되지 않은 Clade D 대표 단백질 3종은 모두 반응하지 않았다. 패턴은 뚜렷하지만 자연계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직접 검증 표본이 작다.

실험 조건도 경계해서 읽어야 한다. 연구진은 TW10828 균주 유래 CBASS 오페론을 대장균 MG1655에 플라스미드로 발현했다. T4 역시 CBASS를 억제하는 acb1·acb2 유전자에 조기 종결코돈을 넣은 형태였다. 자연 숙주의 원래 발현량과 위치, 야생형 T4 감염을 그대로 재현한 구성이 아니다. Cap2와 Cap3는 시험관의 단백질분해효소 의존 활성화에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세포 안의 파지 방어에는 필요했고, 이들이 센서의 위치를 잡거나 발판으로 작용하는지는 아직 추정이다. 루프 절단이 EcCdnG의 촉매활성을 어떤 구조 변화로 켜는지도 남은 질문이다.

이번 발견은 치료용 박테리오파지를 고를 때 파지와 세균 면역체계의 궁합을 예측하는 단서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국내에서도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이 다제내성균 대응을 위한 박테리오파지 자원과 기반기술 확보 사업을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대장균과 조작된 T4를 중심으로 한 기초연구다. 치료용 파지의 선별 정확도나 동물·환자 치료효과를 시험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 이 기전을 재현한 연구나 CBASS 기반 치료 프로그램도 확인되지 않았다. 파지의 필수 조립 공정을 감시하는 경보선이 실제 자연 감염에서 얼마나 널리 쓰이는지, 또 파지가 어떤 방식으로 이를 다시 피하는지는 후속 연구가 풀어야 할 문제다.

자료: Harvard Medical School·Dana-Farber Cancer Institute·University of Utah Health·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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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한 기자 ch.son@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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