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평소엔 침묵하고 가열 순간에만 열쇠를 드러낸다…KAIST 액체금속 보안칩의 ‘미끼 패턴’

평소에는 열쇠 구멍이 보이지 않는 자물쇠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정해진 방식으로 데우는 순간에만 열쇠 구멍이 잠깐 나타나고, 그 전후에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열쇠 구멍들이 대신 모습을 드러낸다. KAIST를 중심으로 한 국내외 공동연구진이 제시한 액체금속 물리적 복제방지 기능(PUF)이 이와 비슷하다. 숨긴 것은 하나의 그림만이 아니라 그 그림이 나타나는 온도와 순간이다.
연구진은 열평형 상태에서는 암호키로 쓸 패턴을 내놓지 않다가 정해진 가열 과정을 거친 짧은 비평형 구간에서만 유효한 열 패턴을 드러내는 소자를 만들었다. 여기서 ‘액체금속 보안칩’은 CPU나 암호가속기 같은 일반 연산용 반도체 칩이 아니다. 액체금속과 고분자를 결합해 만든 열영상 보안 소자이자 라벨에 가깝다. 연구 결과는 2026년 10월 30일 국제학술지 《Nature Communications》에 조기 공개됐다.
복사하기 어려운 지문도 계속 보여주면 학습된다
PUF는 물리적 복제방지 기능을 뜻한다. 제조 과정에서 우연히 생기는 장치별 미세한 차이를 사람의 지문 같은 고유 응답으로 이용하는 인증 기술이다. 같은 설계와 재료로 만들어도 입자의 위치나 내부 구조를 완전히 똑같이 재현하기 어렵다는 점이 보안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똑같은 물건을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공격자가 여러 입력에 대한 출력을 계속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자료를 모아 장치의 답을 예측하는 소프트웨어 모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문을 똑같이 조각하는 것이 물리적 복제라면, 지문 판독기의 문답을 충분히 관찰한 뒤 답을 흉내 내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디지털 복제다. 기존 전기식 PUF를 대상으로 한 2010년 모델링 공격 연구에서도 통계와 기계학습으로 응답을 예측할 수 있음이 실증됐다.
이번 연구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고정된 응답을 언제든 반복해서 읽을 수 있게 두지 않고, 진짜 응답이 나타나는 시간을 재료 자체의 움직임 속에 숨기자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시간 제한 접근성’과 ‘미끼 은닉’으로 설명했다. 후처리 소프트웨어만으로 답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시간에 따라 열을 받아들이고 상태를 바꾸는 과정 자체를 보안 장벽으로 삼았다.
겉보기엔 같은 금속 알갱이, 열을 받는 시간표는 다르다
소자는 갈륨과 필즈메탈 입자를 고분자 안에 무작위로 분산한 복합재료형 액체금속 PUF다. Materials Research Society 선행 발표에서는 이 고분자를 PDMS로 특정했다. 입자의 종류와 위치가 소자마다 우연히 달라지면서 각 장치에 고유한 열 미세구조가 생긴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두 종류의 입자는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열을 받거나 상이 변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상변화는 물질이 고체에서 액체로 바뀌는 것처럼 상태가 달라지는 현상이다. 소자를 가열하면 겉보기에는 비슷한 금속 알갱이들이 서로 다른 시간표로 반응한다. 적외선 카메라로 보면 각 입자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밝아지는 공간 패턴이 되고, 연구진은 이 열화상 패턴을 디지털 암호키로 변환했다.
온도가 안정된 열평형 상태에서는 암호키로 사용할 만한 공간적 패턴이 나타나지 않는다. 논문은 이를 ‘암호학적으로 침묵한 상태’라고 표현했다. 침묵은 장치가 꺼졌다는 뜻이 아니다. 각 부분의 온도가 안정돼 서로를 구분할 만한 열 지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해진 방식으로 가열해 아직 온도가 고르게 안정되지 않은 비평형 구간에 들어가야 유효한 패턴이 나타난다.
Materials Research Society 선행 발표에서는 유효한 열전이창을 약 15초로 제시했다. 다만 이 수치는 모든 소자와 가열 조건에 공통인 고정 제한시간이 아니며, 15초 동안 해킹이 불가능하다는 뜻도 아니다. Nature Communications 논문 초록에는 구체적인 초 단위 시간이 제시되지 않았다.
틀린 조건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대신 그럴듯한 답을 낸다
이 소자의 또 다른 특징은 정해진 온도 범위 밖에서 단순히 빈 화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장치가 온도와 이전의 가열·냉각 이력에 따라 여러 후보 열응답을 내놓는다. 공격자는 그 가운데 어떤 패턴이 인증 시스템에 등록된 진짜 정답인지 가려내야 한다. ‘미끼 패턴’은 별도로 인쇄해 둔 가짜 그림이 아니라 잘못된 조건에서 재료 자체가 만들어 내는 그럴듯한 후보 응답이다.
KAIST는 필즈메탈 입자의 과냉각을 미끼 형성에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과냉각은 물질이 녹는점 아래로 내려가도 곧바로 굳지 않는 현상이다. 같은 온도라도 어떤 열 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따라 입자의 상태와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진짜 열 지문을 찾으려면 초기 상태와 가열 방식, 온도 범위, 촬영 시점을 함께 맞춰야 하는 구조다.
연구진은 스텐실 인쇄와 몰딩으로 패턴을 만들고 보안 라벨과 QR코드 형태의 개념검증을 제시했다. 눈에 보이는 QR 외형만 복사해서는 부족하고, 정해진 열 이력에서 잠시 나타나는 내부 열 지문까지 맞춰야 한다는 구상이다. 연구에는 KAIST, 국립공주대학교, GIST, 미국 MIT와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가 참여했다. 공동 제1저자는 이시목과 김민석, 공동 교신저자는 송영민과 정재웅이다.
짧은 관측창이 곧 완전한 방어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번 연구는 물리적으로 복제하기 어려운 무작위 구조에 시간 의존적 재료 반응을 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공격자가 응답 자료를 모을 기회를 줄이고, 관찰한 패턴이 진짜인지 미끼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연구진이 설정한 소자와 공격 조건에서 복제 저항성을 보였다는 뜻이지 미래의 모든 공격과 운용 환경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안 증명은 아니다.
고속 적외선 카메라와 자동 가열 장치로 같은 소자를 반복 측정할 경우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는 근거는 없다. 여러 차례 냉각과 가열을 거치며 얻은 자료를 합치거나 인증 성공·실패 정보를 함께 관찰하는 적응형 공격이 미끼를 얼마나 걸러낼 수 있는지도 별도 평가가 필요하다. 정당한 판독기의 초기 온도, 가열 속도, 목표 온도와 촬영 시점 같은 절차가 유출됐을 때의 방어력 역시 확인해야 한다.
정상적인 사용에서도 넘어야 할 문턱이 있다. 주변 온도와 공기 흐름, 가열의 균일성, 카메라의 거리·각도·해상도·프레임률이 달라져도 같은 키를 안정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반복적인 용융과 응고, 액체금속의 산화와 입자 이동, PDMS의 열노화가 장기 신뢰성에 미치는 영향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필즈메탈의 과냉각은 미끼를 만드는 수단인 동시에 직전 가열 온도와 유지시간, 냉각 속도에 따른 편차를 낳을 가능성이 있어 장기간의 재현성 검증이 필요하다.
적외선 영상 장비와 가열부가 필요하다는 점도 실제 적용에서 따져야 한다. 일반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 판독했다는 근거는 없으며, 장비의 비용과 전력, 인증 속도가 기존 QR코드나 홀로그램보다 유리한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보안 라벨과 QR코드는 개념검증 단계다. 실제 공급망 도입, 대량생산 수율과 제조단가, 공인 보안인증, 반도체 칩 내부 집적이나 제품 채택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논문은 공개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아 독립 연구진의 재현 결과나 이 연구를 직접 겨냥한 학술 반론을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결국 이 소자가 던진 핵심 질문은 명확하다. 복제하기 어려운 모양만 만들 것이 아니라, 정답을 볼 수 있는 순간까지 물질 속에 숨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연구진은 그 가능성을 액체금속의 열반응으로 제시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숨은 순간이 반복 사용과 현실의 환경, 더 집요한 관측 공격 속에서도 보안 장벽으로 유지되는지 검증하는 일이다.
자료: Nature Communications, KAIST, Materials Research Society, 국제표준화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