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손목시계로 잰 잠, 83개 질병의 신호를 보였다

자다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렘(REM)수면이라 불리는 이 구간에서는 몸은 늘어져 있어도 뇌는 오히려 깨어 있을 때처럼 활발히 움직인다. 이 REM수면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치매나 심부전, 파킨슨증 등 여러 질병에 걸릴 위험이 낮게 나타났다는 대규모 연구 결과가 국제학술지 PLOS Medicine에 발표됐다. 베이징대학교 보건대학원과 수도의과대학교(중국) 공동 연구팀이 영국 UK Biobank 참가자 9만5559명을 중앙값 8.9년 추적해 얻은 결과다. 8.9년은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만큼의 시간이고, 9만5559명은 대형 야구장 관중석을 몇 차례 채울 수 있는 규모다.
손목시계가 어떻게 '꿈꾸는 잠'을 알아챘나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손목에 차는 작은 가속도계(Axivity AX3)를 7일 동안 계속 착용하게 했다. UK Biobank 전체 50만2129명 가운데 23만6519명에게 착용을 요청했고, 10만3611명이 이를 마쳤으며 품질이 낮은 데이터를 제외해 최종 9만5559명(평균연령 56.2세, 여성 56.3%)의 자료를 분석했다.
문제는 손목 움직임만으로는 지금 이 사람이 얕은 잠인지, 꿈을 꾸는 렘수면인지, 깊은 잠(N3수면)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원래 이를 구분하려면 병원에서 뇌파·눈동자 움직임·근육긴장도를 함께 재는 수면다원검사(폴리솜노그래피)를 해야 하는데, 9만5000명 넘는 사람에게 이런 검사를 실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연구팀은 대신 'SleepNet'이라는 딥러닝(사람 뇌의 신경망 구조를 본뜬 인공지능 학습 방식) 모델을 썼다. 수면다원검사 1113박 분량의 데이터로 미리 학습시킨 이 모델에 손목 움직임 데이터를 넣어 수면단계를 추정하게 한 것으로, 표정만 보고 감정을 짐작하는 것과 비슷한 간접 추론 방식이다. 다만 이 모델의 정확도는 수면다원검사와 비교했을 때 각성·렘·비렘 3단계 구분에서 F1점수(정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1에 가까울수록 정확) 0.49 수준으로, 논문도 이를 \"움직임 기반 판별모델치고는 전형적인 보통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렘수면 시간은 평균 17.1분 적게, 비렘수면은 31.1분 많게 추정하는 체계적 오차도 있었다.
연구팀은 이렇게 얻은 수면단계 자료와 2024년 4월까지의 입원 진단 기록을 대조해 1049개 질병·건강 지표와의 연관성을 한꺼번에 살피는 표현형 전체 연관분석을 수행했다.
83개 질병에서 나타난 신호
통계적으로 엄격한 보정(여러 비교를 동시에 할 때 우연한 결과를 걸러내는 본페로니 보정) 기준으로 156개의 유의한 연관성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REM수면이 많을수록 위험이 낮아진 질병이 83개, 깊은 잠(N3)이 많을수록 위험이 낮아진 질병이 7개였다. 반대로 잠자리에서 자주 깨는 시간(WASO, 입면 후 각성시간)이 길수록 위험이 높아진 질병은 6개, 잠자는 시각이 날마다 불규칙할수록 위험이 높아진 질병은 3개였다.
수치로 보면, REM수면이 상위 25% 그룹과 하위 25% 그룹 사이의 차이만큼(사분위범위, 47.6분) 늘었을 때 심부전 위험비는 0.74[95% 신뢰구간 0.68~0.80], 치매 전체는 0.54[0.47~0.62], 알츠하이머병은 0.69[0.57~0.81], 다발성경화증은 0.48[0.36~0.64], 심방세동은 0.83[0.79~0.86]로 나타났다. 위험비란 REM수면이 적은 쪽보다 많은 쪽이 그 질병에 걸릴 위험이 얼마나 되는지를 비율로 나타낸 수치로, 1보다 작으면 위험이 낮다는 뜻이다. 파킨슨증(parkinsonism, 파킨슨병과 관련 증후군을 포괄하는 넓은 범주)의 위험비는 0.20[0.11~0.39]으로 이번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수치 중 하나였다.
깊은 잠 쪽에서는 같은 방식(사분위범위 47.5분)으로 제2형 당뇨병 위험비 0.89[0.85~0.93], 주요우울장애 0.86[0.82~0.91]이 나타났고, 파킨슨병(협의의 진단명으로, 앞의 파킨슨증과는 다른 범주이자 다른 수면 지표에 대한 수치)은 0.70[0.62~0.80]이었다. 반대로 잠자는 시각이 불규칙할수록(사분위범위 93.0분) 주요우울장애 위험비는 1.26[1.18~1.34]으로 높아졌고, 각성시간이 길수록(사분위범위 43.6분) 알코올남용 위험비는 1.22[1.13~1.32]로 높아졌다.
총수면시간과 질병 위험의 관계는 직선이 아니라 U자 모양이었다. 86개 지표에서 이런 비선형 관계가 확인됐고, 이 중 69개는 위험이 가장 낮은 구간이 하루 6~8시간에 몰려 있었다. 흔히 알려진 성인 권장 수면시간(7~9시간)보다는 약간 짧은 구간이다. 6~8시간을 기준으로 5시간 미만 수면자는 심부전 위험비 1.30[1.16~1.45], 제2형 당뇨병 1.18[1.09~1.27], 만성폐쇄성폐질환 1.24[1.13~1.37] 등 여러 질환에서 위험이 유의하게 높았다. 8시간을 넘는 장기수면에서는 주요우울장애(위험비 1.60[1.39~1.84]) 외에는 유의한 위험 상승이 남지 않았다.
\"연관성일 뿐 인과관계 아니다\"
연구팀은 스스로 중요한 한계를 짚었다. 가장 큰 것은 역인과관계, 즉 \"잠이 나빠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병이 이미 시작돼 잠이 나빠진 것\"일 가능성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추적 시작 후 2년 이내에 발생한 질병을 빼고 다시 분석했더니, 원래 156개였던 유의한 연관성 가운데 95개(약 61%)만 유의성을 유지했다. 나머지 약 40%는 애초에 질병이 수면보다 먼저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독립 전문가들도 비슷한 지적을 내놓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소속 전문가는 수면단계가 뇌파를 직접 측정하는 금표준 검사가 아니라 손목 움직임을 넣은 인공지능 모델의 추정치라는 점, 2년을 제외했을 때 156개 중 95개만 남은 점을 들어 \"REM이나 깊은 잠을 늘리는 것이 질병을 예방한다는 근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섬브리아대학교 소속 전문가도 이 연구가 수면 요소와 건강상태의 연관성만 보여줄 뿐 수면 변화가 실제로 질병을 유발하는지는 말해줄 수 없으며, 현재의 손목시계형 기기는 안구운동이나 뇌활동을 직접 측정하지 않아 실제 수면단계를 정확히 판별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그 밖에도 7일치 측정이 평소 수면습관을 완전히 대표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 질병 확인을 입원 기록에만 의존해 병원에 가지 않은 경증 질환이 누락될 수 있다는 점, UK Biobank 참가자 자체가 백인·고소득층 비중이 높은 건강한 자원자 집단이라 일반화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연구비는 전액 중국 국가자연과학기금 등 공적 기금에서 나왔으며 상업적 이해상충은 없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를 인용하거나 후속 분석한 국내 연구·기관·정책 반응은 확인되지 않았다.
언론이 주목한 \"83개 질병 위험 감소\"라는 결과는 그러니 \"잠을 잘 자면 병에 안 걸린다\"는 처방보다는, \"병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수면의 질이 먼저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 다만 5시간 미만의 짧은 잠이 여러 질병의 위험 신호와 반복적으로 겹쳐 나타난 점은,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어도 눈여겨볼 대목으로 남는다.
자료: 베이징대학교 보건대학원, 수도의과대학교(중국), UK Biobank, PLOS Medicine, Science Media Cent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