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UNIST 부총장 "AI 시대 출연연, 대체 불가능한 기술로 승부해야"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미국식 초거대 모델을 따라잡으려 애쓰기보다, '한국이 아니면 안 되는' 영역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공장 바닥의 기름때 묻은 데이터처럼, 실리콘밸리가 쉽게 손대기 어려운 산업 현장이 오히려 한국 과학기술의 승부처라는 것이다.
안현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연구부총장은 지난 21일 한국화학연구원 디딤돌플라자에서 열린 전임출연연구기관장협의회(전출협) 과학기술정책포럼에서 'AI 신(新)지정학 시대 출연연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이번 포럼은 올해 첫 번째이자 통산 56회째로, 글로벌 AI 패권 경쟁 속에서 출연연이 나아갈 방향을 짚기 위해 마련됐다.
"경제와 안보가 한 단어로 묶인 시대"
안 부총장은 지금을 '경제안보 시대'로 규정했다. 최선의 성과를 좇는 경제와 최악을 대비하는 안보는 본래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영역이지만, AI가 이 둘을 하나로 묶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는 "경제는 최선을 추구하고 안보는 최악을 대비하기 때문에 서로 친해지기 어려운 영역"이라며 "AI가 두 영역을 한 단어로 묶으면서 우리는 최선도 추구하고 최악도 대비해야 하는 경제안보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출연연의 존재 이유를 다시 꺼냈다. 한국 과학기술과 출연연의 역사 자체가 국가적 절박함 속에서 경제와 안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을지 고민한 데서 출발했고, AI 시대에 두 영역이 다시 하나로 묶인다면 출연연의 역할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범용 모델 대신 '제조 AI'…한국의 틈새
안 부총장이 제시한 해법은 두 가지 개념으로 압축된다. '전략적 자율성'은 미국이나 중국 기술에 종속되지 않을 힘을, '전략적 대체 불가능성'은 세계가 한국 기술과 기업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영역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 둘의 핵심이 결국 기업과 기술에 있다고 봤다.
구체적 무대로는 '제조 AI'를 지목했다. 공장·설비·현장 데이터와 함께 움직이며 작업자의 경험과 품질, 안전 위험까지 다뤄야 하는 산업 현장용 AI를 가리킨다. 그는 "산업 현장에 필요한 AI는 기름때 묻은 데이터로 기름때 묻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달 몇 년은 뛰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며 "미국은 그런 공장이 거의 없는 반면 가장 익숙하게 잘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강조했다. 가격과 품질만으로 승부가 나지 않고 보안이 절대적 가치가 되는 영역에서는 한국이 여전히 경쟁할 공간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출연연이 대학의 몫도, 기업의 몫도 아닌 '모호한 영역'에서 국가의 부름에 부응하는 기관이라며 "이제는 정말 새판을 짤 때"이고 "미국도 중국도 아닌 한국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TRI·KIST "도메인 지식과 연구 보안이 관건"
발표에 이어진 지정토론에서는 출연연 현장의 과제가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이주진 전출협 명예회장이 좌장을 맡고 전종홍 국가AI위원회 위원(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표준본부), 장준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원장, 이준기 디지털타임스 ICT과학부장이 패널로 참여했다.
전종홍 위원은 출연연에 쌓인 방대한 전문지식을 지렛대로 봤다. 그는 "앞으로는 AI 지능을 전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인프라와 플랫폼을 출연연이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며 "출연연에는 굉장히 많은 도메인 지식이 축적돼 있어 그 지식을 AI와 결합하면 한국이 퀀텀점프할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장준연 부원장은 현장의 불안을 지적했다. 그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아이디어 보안과 고유성이 가장 큰 이슈라며, 이런 불안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AI가 연구 생산성을 높이거나 국가 임무에 기여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AI를 연구에 들이려면 기술만이 아니라 연구 성과를 지킬 안전장치가 함께 가야 한다는 문제 제기다.
다만 이날 논의는 방향과 원칙을 짚는 데 무게가 실렸고, 제조 AI 육성에 필요한 예산이나 구체적 실행 계획은 제시되지 않았다. 전출협은 정책포럼과 정책간담회를 통해 국가 과학기술 혁신체계 안에서 출연연의 역할을 계속 점검하고 정책 제언을 이어갈 계획이다.
참고 자료
· 안현실 부총장 "AI 시대 출연연, 대체불가 기술 산실 역할을" — 헬로디디 (2026.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