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전기 없이 물속에서 스스로 계산하는 DNA 컴퓨터 — 열역학적 평형으로 곱셈·나눗셈부터 25비트 덧셈까지

손창한 기자 · 입력 2026.09.23 07:10
메이누스대 연구진, 뜨거운 소금물을 식히는 것만으로 계산이 끝나는 '스캐폴드 DNA 컴퓨터' 네이처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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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AngusMcKenzie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실험실 유리병 안, 투명한 소금물이 서서히 식어간다. 전원 스위치도, 회로기판도 없다. 그런데 몇 시간 뒤 이 물속에서는 곱셈과 나눗셈, 심지어 여러 자리 큰 수의 덧셈까지 끝나 있다. 아일랜드 메이누스대학교(Maynooth University) 해밀턴 연구소 연구진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DNA 컴퓨터를 개발해 2026년 9월 16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열역학적으로 유리한 분자 컴퓨터: 강건하고 빠르고 재사용 가능하며 확장 가능한(A Thermodynamically Favoured Molecular Computer: Robust, Fast, Renewable, Scalable)'이다. 이 연구는 2025년 7월 사전 공개(프리프린트)됐다가 동료심사를 거쳐 이번에 정식 게재됐다.

계산은 '푸는' 게 아니라 '저절로 정리되는' 것이다

실리콘 칩 컴퓨터는 정해진 순서대로 명령을 하나씩 실행해 답을 찾아낸다. 이번 DNA 컴퓨터는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 연구진은 이를 '스캐폴드 DNA 컴퓨터(Scaffolded DNA Computer, SDC)'라고 이름 붙였다. 짧은 DNA 조각 수십억~수조 개를 마그네슘이 든 완충 소금물에 넣고 약 80도로 가열했다가 천천히 식히면, DNA 조각들은 서로 들러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다양한 구조를 만들었다가 무너뜨리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다 결국 에너지가 가장 낮은, 즉 가장 안정적인 구조 하나로 저절로 수렴한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자리 잡은 구조 자체가 계산 결과다.

흔들어 섞은 직소 퍼즐 조각들을 가만히 두면 결국 딱 맞는 하나의 배열로 저절로 정리되는 모습, 혹은 구겨진 종이가 손대지 않아도 서서히 펴지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전문용어로는 이런 상태를 '열역학적 평형(thermodynamic equilibrium)'이라 부르는데, 계(系)를 이루는 분자들이 더는 에너지를 낮추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가장 안정된 상태를 뜻한다. 이 DNA 컴퓨터는 지속적인 전기 공급 없이, 처음 가열하고 식히는 에너지만으로 계산이 끝까지 진행된다. 연구진이 강조하는 '전기 없는 계산'이라는 표현은 이런 의미이며, DNA를 만들고 가열·냉각 장비를 돌리고 결과를 읽어내는 과정 자체에 에너지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10개 프로그램, 30초짜리 계산부터 14시간짜리 계산까지

연구진은 이 원리로 총 10개의 프로그램을 시연했다. 두 값 중 하나를 그대로 복사하는 비트복사(BitCopy), 8비트 단위로 오류를 검출하는 패리티 검출, 3을 곱하는 연산(MultiplyBy3)과 2로 나누는 연산(DivideBy2), 상태가 세 개인 유한오토마타, 숫자를 세는 카운터, 단순한 규칙으로 복잡한 무늬를 만드는 세포자동자(Rule110), 그래프에서 한 지점이 다른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지 판별하는 문제, 괄호 짝을 맞추는 문제, 그리고 최대 25비트 크기의 두 수를 더하는 덧셈 연산이다. 가장 간단한 계산인 10+3=13은 55도에서 1분 미만으로 식히는 초고속 조건에서 30초~1분이면 끝났다. 반면 1100만대와 2200만대의 25비트 수를 더하는 가장 큰 규모의 덧셈(11,365,078+22,730,421=34,095,499)은 표준 조건에서 최대 14시간이 걸렸다. 스마트폰이 눈 깜짝할 새 끝내는 연산을, 이 DNA 컴퓨터는 하룻밤을 꼬박 들여 처리하는 셈이다. 곱셈·나눗셈·패리티 검출·25비트 덧셈 등 여러 프로그램의 비트 수를 모두 합쳐 '100비트 규모'라고 소개한 보도도 있었으나, 논문 자체가 '100비트'라는 숫자를 직접 정의해 제시하지는 않았다.

기존 DNA 컴퓨터 상당수는 한 번 쓰고 버려야 했지만, 이번 장치는 같은 반응계에 입력 DNA 가닥만 새로 넣으면 여러 차례 다시 계산할 수 있었다. 재사용 가능 횟수는 프로그램마다 차이가 커, 비트복사는 최대 24회, 덧셈 프로그램은 각 8회, 카운터는 23~24회까지 반복됐다. 다만 반복해 쓸수록 신호는 조금씩 약해져, 8회 반복마다 평균 17.3%씩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DNA 컴퓨터의 오랜 숙제, 오류와 에너지

DNA를 이용한 계산은 1994년 레너드 애들먼(Leonard Adleman)이 해밀턴 경로 문제를 DNA로 풀어낸 실험을 시작으로 이어져 온 분야다. 이번 논문도 이 연구를 선행 사례로 인용하고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DNA 컴퓨터는 계산이 끝나지 않은 '비평형' 상태에 의존했는데, 이 때문에 원치 않는 결합이나 신호가 새어 나가는 오류가 구조적으로 발생하기 쉬웠고, 이를 줄이려면 큰 에너지 비용과 정교한 수작업이 필요했으며 대부분 한 번 쓰고 버려야 했다. 이번 연구는 반대로 '계산 결과가 곧 가장 안정적인 평형 상태가 되도록' 반응 자체를 설계해 이 문제를 우회했다고 주장한다. 연구진은 특정 분자 반응 경로를 실험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레세페르(laissez-faire)' 방식을 택했으며, 계산에 걸리는 시간은 이론적으로 시스템 크기의 제곱에 비례할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는 아직 실증된 메커니즘이라기보다 이론적 상한이라고 밝혔다.

느리고 불완전하지만, "가능성을 보여준 것"

연구진 스스로 이 DNA 컴퓨터가 실리콘 칩보다는 느리지만 다른 DNA 컴퓨터보다는 빠르다고 밝혔다. 정확도도 조건에 따라 크게 갈린다. 규모가 작은 계산(스캐폴드 크기 4 이하)은 표준 3시간 냉각 조건에서 평균 수율이 95% 내외로 높았지만, 1분 만에 끝내는 초고속 조건에서는 81~82%로 떨어졌다. 가장 큰 규모인 25개 위치짜리 비트복사 계산은 14시간 냉각 후에도 수율이 약 59%에 그쳤다. 이는 모든 계산의 정확도가 59%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까다로운 대규모 시험 한 건에 해당하는 수치다. 별도의 오류정정 장치는 아직 없으며, 연구진은 논문에서 규모가 커지면 열역학적으로 유리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고 아직 이해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인정했다. 저렴한 생물 유래 재료(M13 파지)를 스캐폴드로 썼을 때는 에너지 특성이 고르지 않아 계산이 느려지고 부정확해지는 현상도 확인됐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응용을 염두에 둔 상용 기술이 아니라 순수 기초과학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교신저자는 이것이 '순수 기초과학(blue skies science)'이며 이 연구가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는 자신들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이번 연구의 목적은 무엇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데 있으며, 이를 실제 세계에 응용하는 일은 다른 이들의 몫이라고 밝혔다. 연구진 중 세 명은 관련 기술의 특허 발명자로도 등재돼 있어 상업화와 관련한 이해관계도 존재한다. 발표 이후 약 1주일 시점까지 독립 연구자의 비판적 논평이나 재현 실패 사례는 따로 확인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DNA를 이용한 회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KAIST 공학생물학대학원이 GIST와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팀은 리셋 없이 실시간으로 연산과 저장을 동시에 수행하는 DNA 논리회로를 2026년 4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발표한 바 있다. 다만 이는 회로를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방식으로, 열역학적 평형에 기대는 이번 메이누스대 연구와는 접근 방식이 다르며 두 연구 그룹 사이에 직접적인 협업이나 인용 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연구는 유럽혁신위원회(EIC)의 디스코(DISCO) 프로젝트(약 400만 유로 지원), 유럽연구위원회(ERC)의 액티브디엔에이(Active-DNA) 프로젝트, 아일랜드 과학재단(SFI)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자료: 메이누스대학교 해밀턴 연구소, 유럽혁신위원회(EIC), 유럽연구위원회(ERC), 아일랜드 과학재단(S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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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한 기자 ch.son@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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