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 등 17개국, ‘초지능의 자율 실험’을 과학 인프라로 키우겠다는 교토 비전

잠들지 않는 재료 연구실을 떠올려 보자. 로봇이 분말을 계량하고 섞어 가열한 뒤 X선으로 결과를 읽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해진 동작을 되풀이하는 자동화다. 하지만 측정 결과를 받은 인공지능(AI)이 다음 온도와 배합을 스스로 고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험 결과에서 다음 실험 선택으로 되돌아가는 화살표’가 생긴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17개국은 이런 자율·폐쇄루프 발견을 미래 과학 인프라의 한 축으로 키우겠다는 공동 방향을 제시했다.
17개국 정부는 2026년 10월 4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23회 STS 포럼 연차총회를 계기로 ‘과학의 황금시대를 위한 교토 비전’을 지지했다. 참여국은 아르헨티나·불가리아·칠레·키프로스·독일·그리스·인도네시아·이탈리아·일본·카자흐스탄·대한민국·뉴질랜드·폴란드·싱가포르·아랍에미리트·영국·미국이다. 공식 표현은 협정에 서명했다는 의미의 ‘signed’가 아니라 비전을 지지했다는 뜻의 ‘endorsed’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교토 비전은 연구논문이나 실험 결과가 아니라 1쪽짜리 공동 정책선언이다. 17개국 공동예산과 국가별 분담액, 시설 수, 컴퓨팅 규모, 착수·완료 시한, 생산성 목표가 적혀 있지 않다. 공동 소유 실험실이나 국제 실험실망을 출범시키고 국가 간 데이터 공유를 의무화한 문서도 아니다. 완공된 과학시설이라기보다 각국이 앞으로 어떤 연구환경을 만들지 그린 설계 구상에 가깝다.
로봇 팔보다 중요한 ‘되돌아가는 화살표’
폐쇄루프 연구는 대체로 ‘다음 실험 선택→자동화 장비의 실행→결과 측정·해석→모델 갱신→후속 실험 선택’의 순환으로 작동한다. 미리 입력한 실험을 로봇이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자율실험이라고 할 수 없다. 정해진 코스대로 도는 세탁기와 빨래 상태를 살핀 뒤 다음 세탁법을 바꾸는 기계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렇다고 AI가 과학자에게서 연구 전체를 넘겨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의 실증 시스템에서도 인간은 목표와 후보물질, 허용 조건, 사용할 장비와 안전 경계를 먼저 정한다. AI가 그 좁은 범위 안에서 다음 실험을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은 연구 질문을 세우거나 결과의 과학적 의미를 판단하는 일까지 대신했다는 뜻이 아니다. 교토 비전이 내세운 ‘초지능’에도 성능 문턱이나 인간 연구자와 비교할 기준이 제시되지 않았다.
선언의 구상은 세 축으로 나뉜다. 첫째, 장기 연구비와 신속 지원금, 상금, 도전형 사업을 조합하고 자율성·자원·지휘 수준이 서로 다른 연구조직 모델을 시험한다. 둘째, 초지능을 문헌 추론과 물리·생물 시스템 모델링, 자율·폐쇄루프 발견에 통합하면서 연구자가 관련 도구와 과학 데이터, 컴퓨팅, 실험시설에 접근할 기회를 넓힌다. 셋째, 잠재력 있는 학생과 초기경력 연구자를 지원하고 첨단장비를 운용·유지·개선할 인력을 육성한다. 공동 박사과정과 펠로십, 협력연구도 장려한다.
장비 운용인력을 별도로 언급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율실험실에는 AI 개발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장비 교정과 소모품 관리, 시료 추적, 고장 복구를 맡을 기술인력과 해당 분야 과학자가 함께 있어야 한다. 장비 제어 방식과 데이터 형식도 제조사와 연구실마다 달라 한 연구실에서 작동한 체계를 다른 시설로 그대로 옮기기 어렵다.
17일 동안 353회 실험, 그리고 수정된 성공률
폐쇄루프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며 어디에서 검증 문제를 만나는지는 별도 연구인 A-Lab 사례에서 드러난다. 이 연구는 교토 비전의 사업성과가 아니다. 현행 수정 논문에 따르면 A-Lab은 17일 연속 운전하며 33개 원소와 40개 구조 프로토타입에 걸친 목표 물질 57개를 다뤘다. 기본 가열 유지시간은 시료당 4시간이었고, 문헌 2만4,304편에서 추출한 고체 합성 절차 3만3,343개를 지식 기반으로 활용했다.
A-Lab은 합성 실험 353회를 수행해 목표 57개 가운데 36개에서 합성 성공을 판정했다. 성공률은 63%다. 그러나 353개 레시피 가운데 목표 물질을 만든 비율은 약 30%였다. 개별 시도 약 10번 중 7번은 목표에 이르지 못한 셈이다. 자율화는 실패를 없애는 기술이라기보다 실패 결과까지 기록하고 이를 토대로 다음 시도를 선택하는 방법에 가깝다. 능동학습, 즉 새 결과를 이용해 다음 선택을 개선하는 과정으로 성과가 나아진 목표는 9개였고, 최종 실패 목표는 17개였다.
더 중요한 대목은 실험 속도보다 검증 속도다. 최초 논문은 목표 58개 중 41개, 71%의 성공을 보고했지만 2026년 1월 19일 저자수정을 거쳐 현행 수치는 57개 중 36개, 63%로 낮아졌다. 현행 논문도 다수의 성공 시료에 부산물이 있었고, 성공 판정이 고순도 합성을 뜻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여러 물질이 섞인 다상 혼합물을 자동 X선회절로 판정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신규 물질’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독립적인 논쟁도 있다. A-Lab 현행 논문은 36개의 합성 성공을 보고했으며, 2024년 독립 연구진은 정정 전 신규 물질 주장에 포함된 43개 합성 산물을 별도로 검토했다. 연구진은 새로운 물질이 발견됐다는 증거가 부족하고 약 3분의 2가 알려진 조성 무질서 물질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A-Lab의 로봇 운전이나 실험 수행 자체가 없었다는 주장이 아니라, 무엇을 ‘발견’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관한 동료평가된 비판이다.
한국도 자율실험실 공모…공식 후속사업인지는 확인 안 돼
한국은 교토 비전을 지지한 17개국 가운데 하나다. 선언에 앞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은 2026년 9월 14일 ‘AI 기반 대학 과학기술 혁신사업’의 자율실험실 신규과제를 공고했다. 사업 형태는 자율실험실 연구센터이며 접수기간은 10월 1일부터 14일까지다.
한국은 2025년 12월 공고된 AI Co-Scientist Challenge Korea를 통해 AI 활용 연구와 과학연구용 AI 에이전트 개발을 두 트랙으로 시험하기도 했다. 약 3개월 동안 진행되는 대회에서 연구용 AI 에이전트 개발 트랙의 예비 선정팀은 10개 팀이며 개발지원금은 팀당 최대 3천만원이다. 전체 수상팀은 최대 16개 팀이고, 자격과 과제 조건을 충족한 수상팀에는 최대 25억원 규모의 후속 국가 R&D 사업 연계 기회가 제시됐다.
이들 국내 사업은 교토 비전과 정책 방향이 맞닿아 있지만 공식 이행사업으로 지정됐다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의 교토 비전 전용 예산과 공동시설, 국가 이행계획, 선정 대학이나 센터 수도 현재 확인 범위에서는 확정할 수 없다.
빠른 실험보다 어려운 신뢰의 설계
폐쇄루프에서는 측정이나 자동 해석이 틀릴 경우 잘못된 판단이 다음 실험에 빠르게 반영될 수 있다. 전자현미경이나 질량분석 같은 추가 분석과 사람의 사후 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교토 비전은 재현성과 투명성, 오류·불확실성 공개, 편향 없는 동료평가, 음성·무효 결과의 가치를 과학적 신뢰 원칙으로 명시했다. 그러나 이를 자율실험 시스템에 강제할 정량 평가기준이나 감사절차는 제시하지 않았다.
안전 규칙도 남은 과제다. 화학·생명과학 자율실험에는 유해물질과 병원체, 장비고장, 사이버공격 같은 위험이 있다. 선언에는 분야별 금지선과 인간 승인 단계, 비상정지 조건, 사고 책임이 정해져 있지 않다. AI 모델과 과학 데이터, 고성능컴퓨팅, 로봇 실험시설의 비용도 접근성의 역설을 만든다. 공공 접근 규칙과 이용료 체계가 없다면 연구 기회의 확대보다 시설 보유기관의 우위가 더 커질 수 있다.
따라서 교토 비전의 성패를 가를 것은 ‘초지능’이라는 이름의 크기가 아니다. 각국이 실제 예산을 마련하고 연구자가 시설과 데이터에 접근할 제도를 만드는지, 서로 다른 장비와 데이터를 연결할 표준을 세우는지, 빠른 실험 뒤에 느리고 엄격한 재현성 검증을 붙이는지가 핵심이다. 여기에 인간의 승인과 비상정지, 책임 규칙까지 갖춰져야 자율실험은 정책선언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과학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자료: 미국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 STS 포럼,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미국물리학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