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반도체 속 타임크리스털 두 개, 40마이크로미터 거리를 두고도 스스로 박자를 맞췄다

손창한 기자 · 입력 2026.10.01 07:38
도르트문트공과대 연구진, 빛이 아니라 스핀을 가진 전자의 확산이 동기화 신호를 실어 날랐다는 사실 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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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Emes2k (Wikimedia Commons·de.wikipedia), CC BY-SA 3.0)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절반도 안 되는 틈을 사이에 두고, 반도체 조각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두 개의 "시계"가 서로의 박자를 알아채고 맞춰나갔다면 믿을 수 있을까. 독일 도르트문트공과대학교(TU Dortmund University) 연구진이 반도체 한 조각 안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두 개의 "시간결정(time crystal)"이 약 38~40마이크로미터(머리카락 굵기의 절반 이하) 거리 안에서는 서로 다른 고유 진동수를 갖고 있었음에도 하나의 공통된 박자로 맞춰짐(동기화)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왜 지금, 무엇이 어려웠나

"결정(crystal)"이라는 말은 흔히 눈 결정처럼 공간 속에서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시간결정"은 그 규칙적 반복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다는 역설적인 이름을 가진 현상이다. 이 개념은 2012년 처음 제안됐을 때만 해도 외부의 어떤 개입도 없는 평형 상태에서 스스로 시간적 주기성이 생긴다는 뜻이었으나, 이후 그런 형태는 이론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며 폐기됐다. 지금 물리학계에서 "시간결정"이라 부르는 모든 실험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계속 공급받는 비평형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시 정의됐다. 이번 도르트문트 연구의 시스템도 마찬가지로, 레이저 빛(광펌핑)을 계속 쏘아 주어야 진동이 유지되고 빛을 끄면 진동도 멈춘다. "에너지 없이 영원히 도는 시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연구진은 앞서 같은 반도체 시스템에서 시간결정 하나가 매우 오랫동안(최소 40분간, 그 이전 유사 현상보다 약 1,000만 배 긴 지속시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연구는 그 후속으로, "반도체 한 조각 안에 여러 개의 시간결정이 동시에 생겨날 수 있고, 이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진동자가 정보를 주고받아 박자를 맞추는 현상 자체는 새롭지 않다. 1665년 네덜란드 과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는 벽에 나란히 걸어둔 추시계 두 개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같은 박자로 흔들리는 것을 관찰했다. 다만 하위헌스의 시계는 벽을 타고 전달되는 미세한 진동이 매개였다면, 이번 반도체 속 두 시간결정은 무엇이 그 신호를 실어 날랐는지가 핵심 질문이었다.

핵심 발견 — 38~40마이크로미터의 동기화

실험은 인듐갈륨비소(InGaAs, 인듐 함량 약 3%, 두께 약 10마이크로미터의 반도체 박막)를 절대영도에 가까운 극저온(약 6K, 섭씨로는 영하 약 267~270도) 상태에 두고 이뤄졌다. 이 조건에서 레이저로 전자의 스핀(전자가 갖는 작은 자석 같은 성질)을 한 방향으로 정렬시키자, 그 편극이 반도체 속 원자핵의 스핀으로 전달되고, 다시 전자와 원자핵 스핀 사이에 되먹임이 일어나면서 외부의 주기적 자극 없이도 스스로 유지되는 자발적인 진동, 즉 시간결정이 두 지점에서 각각 만들어졌다.

두 시간결정은 원래 서로 다른 고유 진동수를 갖고 독립적으로 흔들린다. 그런데 두 지점 사이의 거리가 약 38~40마이크로미터 이내일 때는 두 진동수가 하나로 수렴해 같은 박자로 움직였다. 반대로 이 거리를 넘어서면 동기화는 끊기고 각자 원래의 독립적인 진동으로 돌아갔으며, 약 50마이크로미터에 이르면 결합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는 무한정 먼 거리에서도 통하는 신비로운 동조가 아니라, 반도체 안에서 무언가가 실제로 이동할 수 있는 물리적 거리에 종속된 현상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확인했나 — 빛이 아니라 스핀의 확산

연구진에게 남은 과제는 "두 시간결정 사이에 무엇이 신호를 실어 날랐는가"였다. 후보로는 산란된 펌프광(레이저 빛 자체가 반도체 속에서 흩어져 전달됐을 가능성), 원자핵 스핀들의 확산, 전자가 자리를 옮겨 다니는 호핑 등이 있었다. 연구진은 이들 가능성을 하나씩 배제하는 검증을 거친 끝에, 스핀이 정렬된 전자 자체가 반도체 물질 속을 물리적으로 이동(확산)하면서 정보를 실어 나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숫자의 일치였다. 연구진이 별도로 측정한 전자 스핀의 확산 길이는 실측으로 약 18.3마이크로미터, 이론 계산으로는 약 17마이크로미터 안팎으로 서로 가까웠고, 이는 동기화가 끊기는 거리(약 38~40마이크로미터에서 완전 소실 약 50마이크로미터)와 같은 규모에서 움직였다. 다만 시료 조건에 따라 확산 길이가 8.5마이크로미터 수준까지 낮게 측정된 경우도 있어, 이 거리가 재료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함께 확인됐다. 한정된 수의 시료에서 얻은 결과인 만큼, "확산이 결합의 원인"이라는 설명을 모든 조건에 그대로 일반화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의의와 남은 과제

연구진은 이번 결합이 현재로서는 "수동적(passive)"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밝혔다. 두 시간결정이 가까이 있으면 저절로 동기화되는 현상을 확인했을 뿐, 이를 전기적 신호 등으로 원하는 때에 켜고 끄는 능동적 제어는 아직 구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향후 이 결합 채널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여러 개의 시간결정을 연결한 "스핀 네트워크" 같은 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 제시 단계이며 실제로 구현된 기술은 아니다.

실용화를 논하기 전에 짚어야 할 제약도 뚜렷하다. 이번 실험은 절대영도에 가까운 극저온(영하 약 267~270도)에서만 이뤄졌고, 상온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이번 연구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또한 발표된 지 오래되지 않아 다른 연구팀의 독립적인 재현이나 검증이 아직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반론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럼에도 반도체라는, 이미 현대 전자산업의 기반이 되는 익숙한 물질 안에서 시간결정이라는 낯선 양자 현상이 여러 개 동시에 존재하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번 결과는 시간결정 연구가 "하나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에서 "여럿이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가"로 넘어가는 다음 단계를 보여준다.

자료: 도르트문트공과대학교(TU Dortmun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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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한 기자 ch.son@k-r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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